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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사람은 있잖아. 내가 설거지만 하면 잔소리야.”
“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래. 자꾸 더 깨끗하게 하래잖아.”
“제수씨가 깐깐하네.”
“깐깐한 게 아니라 화풀이 같애. 나만 갖고 난리야. 집안일을 도와줘도 뭐라 그런다니까. 내가 어떻게 도와줄 맛이 나겠어.”
상명이의 짜증을 잠자코 듣던 웅이가 살짝 끼어든다.
“너 약간 그런 스타일이냐? 설거지 다 해놨는데 그릇에 고춧가루 묻어 있는 타입?”
상명이가 어물쩍 넘어간다.
“꼭 그런 건 아니고…… 암튼 집사람이랑은 뭔 일을 같이 못 하겠어.”
웅이는 덧붙이고 싶다. 설거지는 아주 뽀드득뽀드득 소리 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양념이나 기름기 같은 게 남아 있지 않도록 말이다. 그 부분은 웅이에게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집안일에 관해서만은 보조자가 아니라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그때 창용이가 웅이에게 묻는다.
“그거 문신이냐?”
웅이가 자신의 양 소매를 슬쩍 걷어올리며 대답한다.
“아 이거. 얼마 전에 했어.”
소매에 가려져 있던 청소기와 대걸레 타투가 드러난다. 아저씨들의 시선이 일제히 웅이에게로 향한다.
“야! 너는 문신을 뭘 그런 걸 했냐?”
민식이가 경악하고, 웅이가 대답한다.
“그…… 집에서 내가 청소 담당이라.”
상명이가 혀를 찬다.
“새끼, 힘내라.”
영철이가 웃으며 웅이 뒤통수를 쓰다듬는다.
“이 자식 애처가네!”
민식이가 끼어든다.
“잡혀 사는 거 아니야?”
잡혀 산다는 말에 웅이는 조금 자존심이 상한다.
“그런 건 아니고, 내가 청소를 좀 잘해.”
민식이가 웃는다.
“정신승리하느라 고생이 많다, 야. 어렸을 땐 고집도 세고 남자다워 보였는데.”
영철이는 동의하지 않는 듯하다.
“뭘 남자다웠어? 웅이 되게 얌전했잖아. 맨날 구석에 짜져서 책 읽고 시 쓰고.”
상명이가 덧붙인다. “담배 피우고.”
창용이도 덧붙인다. “여자한테 편지 쓰고.”
모두가 웅이를 보며 푸하하 웃는다. 웅이도 멋쩍게 따라 웃는다.
“웅이는 기사보다 연애편지를 열 배는 많이 썼을 거야.”
영철이의 말에 민식이가 상황 정리를 한다.
“그러더니 결국 잡혀 살잖아. 난 이런 문신은 처음 본다, 진짜.”
상명이가 웅이의 술잔을 채우며 묻는다.
“그래서, 요즘 무슨 일 하는데?”
소식통인 영철이가 대신 대답해준다.
“웅이 출판사 취직했어.”
“출판사? 어디?”
웅이가 모처럼 자신 있게 대꾸한다.
“딸이 출판사 사장이야.”
동창들이 떠들썩해진다.
“웅이 딸이 작가잖아.”
“작가야? 유명해?”
“유명할걸?”
“무슨 글 쓰는데?”
“글써서 먹고살기 힘들지 않나?”
“베스트셀러 작가면 얘기가 다르지~”
“맞아. 책 한 권 잘 쓰면 대박 날 수도 있어.”
웅이가 설명을 덧붙인다.
“한 권 써서 대박 난 건 아니고, 여러 권 썼어. 벌써 열 권도 넘어.”
친구들은 웅이의 사정이 점점 궁금해진다.
“그럼, 딸네 회사에 취직한 거야?”
“네가 막 교정도 보고 그러나보지?”
“아니. 내가 책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아. 딸이 다 알아서 해.”
창용이가 묻는다.
“그럼 넌 뭐하는데?”
“나는…… 청소하지.”
웅이의 대답에 민식이가 풉 하고 웃는다. 웅이는 조금 부끄러워진다.
창용이가 다시 한번 묻는다.
“진짜 청소만 해?”
“뭐 운전도 하고…… 이것저것 잡무도 처리해주고.”
영철이가 또 웅이의 뒤통수를 쓰다듬는다.
“이 자식 딸한테 잘해주네~ 완전 시중드는 거잖아.”
시중이라는 말에 발끈한 웅이가 정정한다.
“딸이 나한테 잘하는 거지.”
“월급은 많아?”
“좀 주지.”
“얼마 주는데?”
“적당히 줘.”
민식이가 이죽거린다.
“와이프가 아니라 딸한테 잡혀 사는 거였구만.”
웅이의 심기가 불편해진다. 약한 놈 취급을 받는 것만 같다. 괜히 세게 말을 내뱉어본다.
“씨바, 내가 그냥 맞춰주는 거야.”
동창들이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끄덕인다.
“네가 고생이 많다.”
“여자들 예민하잖아.”
“알지? 작가라서 더 그럴 수도 있어.”
웅이는 알 수 없는 기분으로 술 한 잔을 쭉 들이켠다. 옆에서 영철이가 떠든다.
“우리 딸은 이제 대학 졸업했는데, 날이 갈수록 나한테 온갖 트집을 잡아. 지 아빠를 뭘로 보는 건지 모르겠어.”
영철이가 맞장구친다.
“어디서 보고 들은 게 많아서 그래. 페미니즘? 그런 거 운운하면서 논리적인 척 얘기하는데, 들어보면 오히려 그게 역차별이라고.”
민식이가 웅이에게 묻는다.
“혹시 너네 딸도 막 페미니스트 같은 그런 극단적인 부류는 아니지?”
웅이는 최대한 망설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대답한다.
“극단적인 그런 거는 절대 아니지.”
상명이가 마무리한다.
“그래. 뭐든지 극단적인 건 좋지가 않아.”
웅이는 대화에서 튕겨나가지 않기 위해 집중한다. 오랜 동창들의 말을 따라가며, 아까 걷어올렸던 셔츠 소매를 은근슬쩍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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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이가 잠자코 들으며 못을 박는다. 그는 문득 호시절을 지나고 있음을 느낀다. 딸에겐 젊음과 능력이 따르고 자신에겐 체력과 연륜이 따르는 이 시절. 별다른 슬픔 없이 서로를 도울 수 있는 이 시절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영원할 리 없다. 딸과 함께 흘러온 삼십 년이 웅이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찰나 같은 과거와 도통 모르겠는 미래를 생각하다가 웅이가 입을 연다.
“남자를 만날 거면,”
나사를 조이며 덧붙인다.
“너를 존경할 줄 아는 애를 만나.”
그렇게 말해놓고 웅이는 생각에 잠긴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을 자기도 들었기 때문이다. 웅이가 알기로 여자를 존경할 줄 아는 남자는 잘 없다. 웅이 자신을 포함해서 그렇다. 웅이는 불현듯 지난 동창회를 떠올린다. 사실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내가 다 맞춰준다는 말 같은 게 아니었다.
슬아가 대꾸한다.
“보통은 나보고 존경하라고 하던데. 남자를요.”
“너는 누구든 잘 존경하잖아.”
웅이는 그런 식으로 에둘러서 표현한다. 실은 내가 너를 존경하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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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 <가녀장의 시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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