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 작가의 에세이를 읽고 '80세의 나'를 상상하고 구체화하고 그 방향으로 닻을 잡고 항해하는 삶이란 얼마나 멋지겠는가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막상 '80세의 나'를 구체화하기란 쉽지 않았다.
왠만하면 어느 정도 재산을 비축해 뒀으면 좋겠고, 내가 좋아하는 곳에 걸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을 체력과 위장 건강이 뒷받침되어 있으면 좋겠고... 그런데 이런 놀고 먹는 것 외에 80세의 내가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가기를 원하는가에 대해서는 상상을 이어나가기가 어렵다. 80세의 나는 아마 회사를 다니기는 무리일 거다. 그럼 프리랜서로서 나의 장기를 활용할 수 있는 일, 혹은 나의 자아 실현과 즐거움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그 때의 나는 어떤 일을 해야 행복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 앞이 꽉 막힌 것처럼 더 나아갈 수가 없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녹나무의 파수꾼>에서, 녹나무는 사람들의 념(念)을 기록하고 보관하고 전달할 수 있는 신성한 존재다. 초승달이 뜨는 밤 신성한 녹나무를 찾아가서 후세에 남기고자 하는 마음을 오롯이 나무에 전달한다. 이후 보름달이 뜨는 밤 나와 혈연 관계로 맺어진 자가 녹나무 앞에서 나와의 추억을 떠올리게 되면 내가 남긴 념(念)이 그 사람의 머릿 속에 생생하게 재생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후에 념(念)을 남긴다는 건 한 사람의 인생이 그의 태어남과 죽음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의 존재에 '영생'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한편으로는 녹나무가 아니더라도 자기 존재를 영생으로 이어가며 자신의 삶에 영원한 존재 가치를 부여하는 이들이 떠올랐다. 유명한 음악가와 작가와 사상가들.
음악과 책을 남기는 방법이 아니더라도, 보통의 사람들은 '자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이어간다. 자식을 낳아 기르는 건 단순히 나의 DNA를 세상에 남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 코코의 유명한 사운드 트랙 'Remember me' 에서 직관적으로 전달하듯이 나의 이야기를 나의 소중한 사람이 기억하고 나를 떠올려줄 수 있다는 데에서 가족의 의미가 빛을 발한다. 찰나의 인생이 부활을 얻는다.
건강과 돈이 넉넉치 않기 때문에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자식을 통해 내 존재의 의미를 이어가는 것보다는 한 권의 책을 남기는 게 여러 모로 효율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럼 나는 어떤 책을 남길 수 있을까? 어떤 이야기를 남겨야 누군가에게 읽혀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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