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담백하고 좋은 단편 소설집을 읽었다. 담겨 있는 소설들이 모두 마음에 들었고 인터뷰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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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어 : 어쩌면 이 소설은 '정상적인' 삶의 연극성을 과장 없이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맡은 역할과 삶이 분열 없이 대응하는 인물입니다. 대학생 시절 "뭔가 다른게 되어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연극 동아리에 가입했지만 비중 없는 대학생 역할만을 연기하게 되었던 것처럼요. 문득 하늘에서 떨어져 전조등을 고장 내는 "군청색 털 고무신"처럼 기이한 조짐이 있지만, 주인공은 그 조짐을 추적하지 못한 채 망각하고 말지요. 주인공은 특별한 사건도 일탈도 없이 살아온 자신의 삶에 공허함을 느끼다가도, 이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충만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 충만함까지도 묘하게 연극적이지만, 주인공은 그것을 의식하지 않겠지요.
그렇다면 주인공의 이 평온하고 성실한 삶은 무한한 무대 위의 끝없는 연극처럼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요, 아니면 예기치 못한 사건에 의해 결국 깨어지고 말까요? 한마디로 주인공은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될까요? 이것은 김기태 작가가 소설 이후에 이어질 인물의 삶을 염두에 두시는지, 혹은 인물의 미래는 소설이 끝남과 함께 추적 불가능한 곳으로 놓아주시는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 구체적인 미래를 상상하진 않지만 응원 비슷한 기분으로 떠나보내는 때가 많은 듯합니다. 이번 주인공의 경우, 예기치 못한 사건은 언제나 일어나겠지만 쉽게 흔들리진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삶이 연극이라면 그는 점점 좋은 배우가 되지 않을까요. 무대에서 긴 세월을 보낸 훌륭한 배우를 상상해 봅니다. 일상에서보다 캐릭터로서 웃거나 울었던 때가 더 많을 정도인 배우를요. 그 얼굴에 주름을 새긴 건 허구의 시간일까요 현실의 시간일까요. 어쨌든 주름만은 진짜라고 할 수밖에 없고, 한순간 그 주름들에 불가해한 위엄이 서릴 수도 있겠지요. 결말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충만함은 분명 연극적이지만, 아주 오래 그답게 성실히 역할을 수행한다면 그건 분명 존중할 만한 삶이라고 생각해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에 비추어 본다면 가짜 감정에서는 가짜 관계만 만들어질 수 있겠지요. 그러나 감정이란 건 심을 때는 콩인지 팥인지 결정 되지 않은 상태고, 오랜 세월 구체적인 보살핌이 누적되면서 형성되는 걸지도 몰라요. 그는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관계를 보살필 테니 나름대로 단단한 열매를 얻을 거라고 저는 믿고 싶습니다. 말씀하신 삶의 연극성에 기대어 이 소설을 쓴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꼭 삶이 허위나 가장(假裝)이라는 인식은 아니었거든요. 오히려 연극이기 때문에 수행자의 의지가 개입될 수 있는 그런 가능성까지 포함하는 것 아닐까 해요. 집중력을 발휘해서 몰입한다면 멋진 일을 해낼 수도 있는 거지요. 물론 이 인물이 망하길 바라는 독자분도 있을 것 같은데요. 멀쩡한 인물의 내면에 도사린 결핍이나 행복한 가정의 곪은 속을 들여다보는 게 소설의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로서는 '완벽은 아니어도 대체로 행복하면 그냥 행복한 걸로 치자'는 식의 천진한 믿음에 기대는 편을 선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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