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이태원 몬드리안 호텔 지하에 있는 서점을 발견한 후 종종 찾아오고 있다. 책 큐레이션이 잘 되어 있고 매장 내 소파가 여러 개 있어서 마음껏 책을 골라 읽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는 가끔 집은 내가 되고 라는 책을 여기에서 재미있게 읽었고, 오늘은 나는 왜 생각이 많을까와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 두 권을 골라 구매했다. 옆에 있는 빵집으로 옮겨 와서 책을 읽는데, 감정을 글로 옮겨 적으면 이성을 관장하는 전두엽이 활성화되어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적혀 있는 부분을 보고 오랜만에 블로그 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슬프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 블로그에 일기를 씀으로써 감정을 정리하고 배설하고 정화가 되었던 경험은 이미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머릿속이 뿌연 안개처럼 자각할 수 없는 어떤 감정으로 꽉 차 있을 때, 이것을 차분하고 냉정하게 들여다보고 언어라는 도구로 분석하고 해체하여 하나씩 묘사해 내는 일은, 쉬이 엄두를 낼 수 없게 막막하다.
올해 상반기 나에게는 크게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하나는 아빠가 위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하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자 친구가 우리가 헤어질지 말지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자고 한 것이다. 전자는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한순간에 소진시킨 후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올 수 있게 했지만, 후자는 나의 일상을 조금씩 계속해서 갉아먹고 있다. 장마 기간의 스펀지처럼 나를 계속 축축하고 무겁게 가라앉힌다.
남자 친구가 헤어짐을 생각하는 이유는, 본인이 너무 바빠서 나에게 잘해줄 수 없고 그것이 너무 미안해서 더 늦기 전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라는 것이다. 그런 이타적인 이유로 헤어짐을 말할 수 있다는 게 어이가 없고 이해가 안 되어서 나는 아무런 결정도 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다. 물론 그가 많이 바쁜 상황이고 직업상 앞으로도 계속 바쁠 수 있지만,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어떻게든 붙들고 더 잘하려 하지 않을까. 나를 놓아주겠다고 말해주는 사람을 꼭 붙들고 있는 것은 오히려 나인 것 같은데. 왜 내가 놓아주기를 바라는 걸까. 정말 내가 더 행복하기를 원해서? 그 사람이 말한 이유가 그것뿐이라 생각이 빙빙 돌뿐 결정할 수 있는 방향으로 뻗어나가지 못한다.
헤어지고 싶은 다른 이유가 있는데 나에게 상처를 줄까 봐 그냥 더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을 만나라는 말밖에는 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물어보았더니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답변만 돌아왔던 것 같다.
차라리 헤어지자고 결론을 내려준다면 마음을 추스리고 다른 사람을 만나든, 혼자인 것에 익숙해지든 할 텐데. 서로 생각해 보자는 애매한 상황 때문에 더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내가 어떻게 해주기를 원하는 거야. 헤어지지 말자고 하면 상황의 연장이고 반복이 되겠지. 그렇다고 나에게 헤어짐을 떠넘기는 건 너무 잔인하잖아.
워낙 생각이 많고 쉽게 결정을 못 내리는 성격인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우리 관계의 결말이 이런 식일 줄은 몰랐다. 함께 있을 때 마냥 좋아서 이 사람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지금 함께 있는 것이 좋으니 앞으로도 함께할 생각일 거라고 믿었던 게 나이브한 착각이었다니.
나는 오빠가 바빠도 괜찮다고까지 했는데. 본인이 안 괜찮다고 하니 그럼 정말 이 관계를 붙잡고 있는 건 나잖아. 어디로든 다시 나아갈 수 있도록 어떻게든 그냥 결론이 났으면 좋겠다. 내가 손을 놓아야 결론이 나는 거라면 놓아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