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간이 삶을 바꾼다고 믿는다. 중랑천 근처의 아파트에서 살았던 시절 여름날 캔맥주를 사들고 근처 공원에 가서 벤치에 앉아 하루키 소설을 읽었던 시간, 새벽에 집 근처에 있던 중랑천을 따라 자전거를 타며 라디오를 듣던 순간을 소중하게 기억한다. 이후 1호선 월계역 근처 단독주택의 2층집으로 이사를 가면서 내가 질려버린 건 1호선을 타고 출근하는 사람들의 낡고 지친 풍경과 함께, 집 근처에 마음 둘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지금은 성동구 금호동의 낡은 주택 2층집에 아빠와 동생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 집은 월계동에 살 때보다 작아졌지만 내 방 창문 앞에 감나무의 푸른 잎사귀가 보이는 나름 운치 있는 풍경을 얻었다. 십오분 정도 걸어나가면 한강 공원을 만끽할 수 있고 서울숲이나 이태원 같은 멋진 공간을 쉽게 (때로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삶의 만족도는 훨씬 올라갔다.
그러나 코로나 때문에 재택근무를 하면서 이 집의 불만스러운 점이 나를 끈질기게 괴롭히게 되었다. 아빠가 택시 일을 하고 오전 일찍 퇴근하기 때문에 하루 종일 좁은 집에서 부대끼며 지내는 것, 방 바로 옆이 화장실이라 가족들이 변기를 쓰는 소리를 밤 늦게까지 들어야 하는 것, 집이 2층이라 창문 밖에서 가래침 뱉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어오는 것, 방이 좁아 매트리스는 접이식을 쓰고 매일 이불을 접어서 보관해야 하는 것, 여름이면 바퀴벌레를 비롯한 여러 생명체들이 침입하는 것 등 (한 밤중에 천장에서 바퀴벌레가 내 손 위로 떨어져 잠을 깨는 일도 있었지). 그동안 이 집의 좋은 점 때문에 이런 단점들을 어느 정도 참아낼 수 있었지만 일주일에 4일은 재택근무를 하는 요즘에는 이 집의 위치적인 장점이 바래고 공간의 단점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다.
마침 전 직장의 퇴직금이 통장에 들어오면서 집을 사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약 반년째 부동산 강의를 들으면서 적절한 매물을 물색하고 있다. 그러나 집을 사더라도 바로 독립을 시작할지, 아니면 전세를 놓고 여전히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생활비를 줄일지, 정 독립을 하고 싶다면 좀 더 적은 비용으로 오피스텔에 사는 게 낫지 않을지 여전히 고민 중이다.
유투브에서 자신의 집을 온전히 자신의 취향으로 채우고 공간을 만끽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그래, 돈 때문에 지금의 행복을 희생하지 말자' 싶다가도 매달 은행에 낼 대출이자를 계산하면 지금처럼 최저 비용으로 생활하면서 저축이나 더 하는 게 노년을 생각했을 때 더 현명하지 않을까 싶기도 한다.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행복. 둘 중 하나에 집중하면 하나를 양보해야 하는 걸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미래의 행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현명한 현재를 살되 너무 현재의 행복을 희생시키지 않는 것. 그런 의미에서 오늘 오후에 청담동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는 것에 너무 죄책감을 느끼지 말아야지... 그리고 올해 안에 똘똘한 한채 마련하기 프로젝트는 킵고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