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가끔 집은 내가 되고

유연하고단단하게 2022. 3. 26.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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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에서 보내는 시간도 물론 중요하지만, 집 밖에는 어떤 풍광이 펼쳐지는지, 거리에선 어떤 사람들을 마주치게 되는지, 어떤 소리가 들리고 어떤 향이 바람에 실려 오는지도 몹시 중요하다. 간간이 들리는 새소리를 배경 삼아 잎이 무성한 나무를 볼 수 있는 집과 새벽까지 차들이 신경질적으로 빵빵대는 소리에 시달려야 하는 집. 마음만 먹으면 걸어서 10분 내외로 공원에 닿을 수 있는 곳과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유흥업소만 보이는 곳. 혹은 이른 아침 집을 나섰을 때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나 정장을 입고 바삐 걸음을 재촉하느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동네와 여전히 술에서 깨지 못한 채 아무 데나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동네는 그 자체로 다를 뿐 아니라 나의 기분과 태도에도 다른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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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종일 창문을 열어놓고, 바닥에 머리카락이나 먼지가 눈에 띈다 싶으면 청소기를 돌린다. 건조기는 사용할 때마다 먼지 통을 처어소하고, 이불은 항상 팽팽하게 펼친 상태로 침대를 덮도록 유지한다. 물건을 쓰고 나면 꼭 제자리로 돌려 놓아 지저분해 보이지 않도록 한다. 욕실은 샤워할 때마다 스퀴지로 물기를 제거한다. 고사리와 이끼, 아랄리아에게는 아침에 일어나서 꼭 스프레이로 물을 뿌려주고, 행주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과탄산소다를 넣어 팔팔 삶는다. 일이 몰려들어 정신 없이 바쁜 날들에도 집은 예전처럼 더러워지지 않는다. 나는 왜 이 모든 일이 더 이상 귀찮지 않아진 걸까?

미니멀리즘에 관심을 가지고 물건을 줄여나가기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사실 맨 처음 자취를 시작했던 작은 오피스텔에 살 때가 가장 적은 물건을 소유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 집은 너무 좁아서 침대와 책상을 제외하곤 별다른 가구를 놓을 수도 없었고 유일한 수납공간은 문 두개가 달린 붙박이장뿐이었다. 그 안에 옷과 각종 짐을 같이 보관하려면 옷가지 수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두 개의 역할을 부여받은 건 붙박이장뿐이 아니었다. 책상을 때에 따라 식탁이 됐고, 낮 시간의 침대는 소파 역할을 했다. 식탁과 책상, 거실 의자와 침대가 다 따로 있는 지금과 비교하자면 훨씬 단촐한 삶이었다. 하지마 나는 오히려 그때 항상 물건이 많다고 느꼈다. 그때도 지금처럼 집을 사랑했고 내 주변을 아늑하게 가꾸려고 노력했지만, 그 집에서는 같은 일을 해도 에너지가 더 빠르게 고갈되었다. 앞 건물을 신경 쓰지 않고 창문을 활짝 열어 온종일 신선한 공기를 들일 수 있는 집, 하나의 용도를 가진 가구들이 서로 모여 하나의 용도를 가진 바에 나뉘어 있는 집, 이른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충분한 빛이 들고 창밖으로 아주 일부분일지라도 자연을 볼 수 있는 집. 주거 환경이 바뀌고 달라진 건 서류상의 실내 면적뿐만이 아니었다. 마음의 공간도 훨씬 넓어져 같은 삶을 살고 같을 일을 하더라도 모든 걸 전보다 여유롭게 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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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할 땐 무조건 스피커로 음악을 튼다. 운동할 때나 운전할 때, 친구들과 집에서 술을 마실 때는 가사 있는 팝송을 주로 듣지만, 오전에 집안일을 할 때 만큼은 가사 없이 피아노 선율이 주가 되는 음악을 듣는다. 그날 선택하는 플레이리스트에 따라 하루의 시작이 클래식이 되기도 하고 영화 주제곡이 되기도 한다. 그런 노래들을 듣고 있으면 왠지 내가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아서 완벽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투피스 잠옷을 입은 채 침대에서 일어나 바로 침구를 정리하고,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키며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가벼운 몸놀림으로 청소기와 세탁기를 돌리는 주인공은 있어도 침대에서 나오지 않고 계속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거나 청소가 싫어 먼지가 굴러다니는 집에서 사는 주인공은 상상하기 힘드니까. 같은 이유로 청소 후 마시는 음료도 최대한 그럴듯하게 만든다. 따뜻한 커피는 꼭 머그잔에 내리고, 아이스 라떼를 마실 땐 유리잔에 얼음과 우유를 먼저 넣고 샷을 천천히 부어서 층을 만든다. 차는 꼭 찻주전자에 찻잎을 넣어 우리고 찻주전자와 세트인 찻잔에 조금씩 나누어 따른다. 핫초코는 중탕한 우유에 분말을 잔뜩 풀어 진하게 타고, 약간의 우유를 남겨 거품기로 밀크폼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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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 뽐뿌가 진하게 오는 책,  <가끔 집은 내가 되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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