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경의중앙선에서 마주치다

유연하고단단하게 2022. 1. 22. 12:16




1.

“백마역으로 가겠다고? 너 경의중앙선 타 본 적 있어?”
“아니?”

나는 휴대폰으로 지하철 노선도를 검색하면서 답했다. 백마역에서 타고 한남역에서 내리면 될 것 같았다.

“야, 택시 타라니깐. 내가 돈 줄게.”

나는 피식 웃었다.

“됐어. 책 장사에 뛰어든다는 놈이, 돈 아낄 줄 알아야지.”

친구가 비장한 표정을 하고는 내게 다가왔다. 그는 내 두 손을 꼭 잡았다.

“힘 내. 미안하다, 무기라도 빌려줘야 하는데…. 여기에는 그런 게 없네. 가다가 연장이라도 하나 사 들고 가.”
“술이 아직 덜 깨긴 했나 보네.”

친구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가 끝내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이내 낯설도록 엄숙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웃기네.



2.

“와, 용감하시네. 하고많은 지하철 중에 경의중앙선을 타요? 저기 저 사람들 안 보여요?”

그는 손을 내뻗어서 승강장 위에 수없이 널브러진 시체 같은 사람들을 가리켰다.

“저… 여기 처음 와 봐서. 왜 저러고 있는 거죠?”
“기차가 연착돼서 저러고 있는 거잖아요.”
“예?”

조금 전 들었던 그 열차 브레이크 소리가 갑자기 또 들려왔다. 나는 소스라치며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텐트 옆에서 한 여자가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거기에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치 조형물처럼 생기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끼… 끼끽… 너도 나처럼 될 거야…. 끼긱….”
“떽! 조용히 해!”

나를 구한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널브러져 있던 여자는 지지 않고 나섰다.

“끼긱… 나는 2주일 전 홍대에 약속이 있어 백마역에 발을 들였지…. 끼기긱… 하지만 열차는 지금까지 오지 않았어! 너도 곧 여기에 속박…”
“저 양반 얘기는 듣지 마요. 여기 사람들은 열차에 대한 집착 때문에 열차가 멈출 때 나는 소리를 내요. 괴로운 소리죠.”

날 구한 사람이 내 귀를 막았다. 도저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던 여자는 지쳤는지 다시 쓰러졌다.



3.

“나는 만화 그리다가 머리가 아프면 저걸 읽으면서 정신을 차려요.”

스크린도어에는 시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시들이란… 음.

‘극동의 소국 대한민국/하지만 우리는 해냈다/우리는 대한민국이었다/대한민국 만만세’ 같은 내용이라든지, 근본적으로 추악하고 뻔뻔한 성희롱이나 다름없는 내용이 주류였다.

“제가 시에 조예가 깊진 않지만 이건 좀, 끔찍한데요.”



4.

“네, 이럴 줄은 몰랐죠. 전 버스로 출퇴근하거든요. 저희 집에서 20분 정도 걸리는데….”

순간 싸늘한 시선들이 내게 몰리는 것을 느꼈다. 성하리가 황급히 내 입을 막았다. 주변 사람들이 내 말을 듣고 반응한 것 같았다. 성하리는 다급히 속삭였다.

“미쳤어? 여기서 출근 시간 얼마 안 걸린다는 말 하면 큰일 나요! 다들 그거 때문에 이 꼴이 난 사람들인데!”

나는 얼이 빠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세상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네요.”




단편집 땡스 갓, 잇츠 프라이데이 | 심너울
'경의중앙선에서 마주치다' 중에서

I love this wi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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