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드라이브 마이 카

유연하고단단하게 2022. 1. 2. 17:14



1.

예술이 의미 있고 위대한 이유는 그것이 삶을 가장 극적인 방법으로 위로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하루키의 단편 소설 속 어느 부분을 진하게 응축시키고 풍부하게 펼쳐 놓은 듯한 영화. 그래서 오히려 하루키의 소설과 가장 닮은 영화.


3.

영화의 중간부까지는 주인공의 단단함과 무거움에 매료되었다. 가후쿠는 그 어떤 파동도 깊이 삼킬 수 있는 고요한 바다같은 사람이다. 오토의 남편으로, 유능한 연출가로, 때로는 누군가의 동료이자 선배로서도 그는 자신의 역할을 어느 상황에서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수행한다.
한편 드라이버 미사키는 그보다도 더 깊은 내면을 간직한 사람이다. 가후쿠가 잔잔한 바다의 지평선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라면 미사키는 칠흙같이 깊은 심해와 같은 사람이다.

루틴한 모노 톤의 생활 방식, 어떤 선을 긋고 이를 기준으로 타인의 호의를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것,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지나치게 드러내지 않는 건 가후쿠와 미사미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다. 주변 사람이나 가족 심지어 스스로의 고통조차도 깊이 들여다보지 않고 무심한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삶을 흔들림 없이 통제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삶의 균열을 못 본 척 지나쳤기 때문에 잃어버린 순간들과 기회에 대해, 돌이킬 수 없게 된 일을 가후쿠는 울며 후회한다. 오토의 뒤틀린 욕구와 딸의 죽음으로 생긴 거대한 공백에 대해 이야기하고 분노하고 용서하고 용서받을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해.

그의 후회에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일상의 작은 파동에도 사시나무처럼 떨며 위태롭게 반응하는 편인 나로선 가후쿠의 심연과 같은 평온함과 태도의 꾸준함이 그저 본받고 싶을 뿐이다.
삶의 거칠고 위태롭고 추한 부분을 매순간 외면 없이 똑바로 마주하고, 생채기가 나기 위해 겉옷을 올려 붙이고, 충분히 괴로워하는 일에는 자신이 있다. 그로 인해 굳은 살이 두꺼워지기는 하지만, 내 삶이 한 단계 더 나아지거나 내가 더 나은 사람으로 고쳐지거나 더 최선을 다하게 되었다고는 말 못하겠다.


4.

3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지루하지 않은 비결은 여러 개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끊임 없이 중첩된다는 것이다. 가후쿠와 오토의 조금 뒤틀린 부부 관계, 짝사랑하는 남자아이의 빈 집에 몰래 들어가서 흔적을 남기는 여고생, 가후쿠가 연출하는 연극 바냐 이야기, 어린 나이에 맞지 않는 성숙함과 운전 스킬을 지닌 미사키의 비밀 등등.


5.

여러 가지 언어를 사용하는 배우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대화를 나누는 가호쿠 식의 연극 방식. 처음에는 그것이 마치 바벨탑을 쌓아올리는 인간의 소망과 같아 아름답게 느껴졌다. 언어의 제한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기에.

그러나 사실, 배우들은 모든 대사와 줄거리를 통째로 암기하여 상대가 어떤 말을 하든 상관 없이 묵묵히 자신의 역할과 자신의 대사를 이어가는 것이 가후쿠식 연기 방법임이 드러난다. 이는 사실상 소통의 부재이고, 가후쿠가 아내의 외도에 상관없이 평온한 가정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가후쿠의 이름 뜻이 '가정의 행복'이라는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반면 윤수는 아내인 유나의 언어, 수화를 적극적으로 배우고 그녀와 소통하기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하여 그녀와 결혼까지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가후쿠의 방식과 대조적이다.


6.

이 영화의 또다른 매력은 우리의 삶과 닮아 있는 '영화적이지 않은' 전개 방식에 있다. 아내의 외도나 죽음을 목격하는 장면은 긴장의 고조나 예감 없이 찾아오고, 고통과 불안은 사소한 부분에서 촉발되거나 사그러든다. 크고 작은 상황들에 대해서 등장인물들이 대처하는 방식 또한 야단스럽지 않고 자연스럽다.


7.

스토리와는 별개로 영화 속 사운드와 미장센이 너무 좋다. 도쿄에서 히로시마 바닷가 마을 그리고 홋카이도의 눈 덮인 시골까지 일본을 세로질러 여행하는 듯 즐거운 시각적 경험을 할 수 있다. 아름답고 잘생긴 배우들의 외모를 감상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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