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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적으로 파멸해가는 연약하고 매력적인 청년은 주인공의 '또 다른 자아'입니다. 그와 결별하지 않으면 주인공은 성숙을 향한 도정(道程)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자아는 청소년기의 기억 속에 내버려두기에는 지나치게 매력적입니다. 그 때문에 주인공은 '죽은 청년'의 추억을 자기 몸속에 새겨놓은 채 이른바 '한 몸으로 두 세상을 사는 것'처럼 성숙의 여정을 걸어갑니다. 아니, 성숙이란 자신의 미성숙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것을 자기 안에 껴안은 채 나이가 들어가는 인격적 다면성이라는 것이 이러한 청춘소설의 근원적인 메시지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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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리저리 긁어모은 식재료'로 '보통 음식'을 조리하는 장면을 실로 꼼꼼하게 묘사합니다. 대개 언제나 있는 것을 긁어모아 사용합니다. '있는 것을 활용하는' 자세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관과 곧바로 결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조건은 '이미 부여받은' 것입니다. 어떤 나라의 어떤 부모 슬하에서 태어나는가, 어느 수준의 신체 능력이나 지적 능력을 타고나는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은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 속에 '내던져진' 형태로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쓸 만한 것은 주어진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손에 쥐어진 자원을 활용하여 최고의 성과를 내놓는 것, 그것뿐입니다. 이는 '이미 있는 식재료'를 가지고 만들 수 있는 최선의 요리를 내놓는 마음가짐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이 만든 요리에 대해 맛이 어떻다느니, 어떤 점이 맛있다든지, 먹음직스럽게 담아 식욕을 돋운다든지, 이러쿵 저러쿵 아는 지식을 다 늘어놓는 미식가 작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이 남아도는 재료를 가지고 보통 음식을 조리하는 과정을 자세하게 묘사할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 이야기의 본질을 적확하고 심오하게 드러내는 작가는 찾아보기 드뭅니다.
청소도 그렇지요. 청소는 본래 허무한 일입니다. 한번 청소를 한다고 해서 깨끗한 상태가 유지될 리 없습니다. 아무리 청소를 해도 모르는 사이에 먼지가 쌓이고 때가 묻어 일껏 구축해놓은 질서가 흐트러집니다. 청소는 끝없는 작업입니다. 습격해올 무질서를 일시적으로 돌려놓는 일밖에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청소하고 있는 순간만큼은 우주로 퍼지는 무질서에 대항하여 부분적으로나마 질서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청소하는 사람'이란 모험적이지 않은 인상을 풍기지만 실로 인류에게 주어진 과제, 즉 '국지적인 질서를 생성하기 위한 끝없는 노력'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눈 치우기'에 관해 쓴 적이 있는데, 청소도 실은 대단히 형이상학적인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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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자라고 늘 올바를 리 없습니다. 경험적으로 말하더라도 인간은 종종 약하며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것이 '본모습이 지닌 연약함' 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올바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늘 잠식하려 드는 '본모습의 연약함'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의 등장인물은 누구든 마음 속에 어쩔 수 없는 '연약함'이 있고, 그것은 어느 지점에서인가 임계점에 달합니다. 《양을 쫗는 모험》의 '쥐'나 《노르웨이의 숲》의 나오코, 《해변의 카프카》의 카프카 소년이 어느 날 '경계'를 넘어버리는 것은 연약함의 효과입니다. 연약함을 계기로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이 열린다는 것이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의 설화적 원형 중 하나입니다. 그는 연약함에대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인상적인 구절을 남겨 놓았습니다. 작품의 나는 '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강한 인간 따위는 어디에도 없어. 강한 체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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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다쓰루, <하루키 씨를 조심하세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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