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무일이라고 마음이 풀려서 아침에 천 칼로리 넘게 먹고 우울해지려던 찰나, 마침 하정우 에세이 '걷는 사람'에서 다음 구절을 읽고 몸을 일으켜 홈트를 하고 하루의 시작을 수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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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면 침대에 누워서 하게 되는 생각들이 있다. ‘조금만 더 누워 있자. 오늘 딱 하루만이야…… 아, 그런데 나는 항상 왜 이 모양일까?’ 이런 생각들에는 언제나 지고 만다. 그럼 이 부정적인 생각들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와는 정반대의 건강한 생각들을 해야 할까? 이를테면 아침 운동의 좋은 점에 대하여? ‘아침에 운동하면 건강해지고 하루를 성실하게 시작할 수 있으니 그만 일어나자! 넌 할 수 있어!’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지친 내 몸을 소외시키고 다그치는 이런 얘기는 피로한 나에게 먹히지 않는다. 내 경험상으론 그보다는 단순한 행동과 결심이 훨씬 더 힘이 세다.
일단 몸을 일으키는 것.
다리를 뻗어 한 발만 내디뎌보는 것.
이러한 행동들이 매일같이 이어져 습관이 되면 그다음부터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일어나 걸을 수 있다. 몸에 익은 습관은 불필요한 생각의 단계를 줄여준다. 우리는 때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에 갇혀서 시간만 허비한 채 정작 어떤 일도 실행하지 못한다.
내 컨디션이 좋고 여러 조건들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을 때 비로소 걷는 것이 아니다. 나중에 내가 정말 바닥을 기는 최악의 상황이 왔을 때도 관성처럼, 습관처럼 걷기 위해 나는 오늘도 걷는다. 때론 걷다가 ‘그만 걸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치솟기도 하고, 걷기도 전에 ‘오늘은 나가지 말까?’ 하는 유혹이 뻗칠 때도 있다. 하지만 걷기를 방해하는 이런 생각들은 결국 곧 흘러가버릴 것임을 나는 안다.
한 발만 떼면 걸어진다. 그러니 도무지 꼼짝도 하고 싶지 않은 날 아침엔 일단 일어나 한 발, 딱 한 발만 떼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 한 걸음이 가장 무겁고 어렵게 느껴지겠지만, 이내 깨닫게 될 것이다. 머릿속에 굴러다니는 온갖 고민과 핑계가 나를 주저앉히는 힘보다 내 몸이 앞으로 가고자 하는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흔히 ‘번아웃’ 혹은 스트레스증후군으로 불리는 상태에 빠지면 당장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단순한 육체 피로로 여기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누워서 쉬려고 한다. 극단적으로 지쳤을 때, 의외로 많은 이들이 계속 먹거나 종일 자거나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거나 하는 식으로 ‘몸을 움직이지 않는 방법’을 택한다. 하지만 이러면 분명 쉬긴 쉬었는데도, 통 나아지는 게 없다는 느낌이 든다. 일상으로 복귀해야 하는 날이 닥쳤는데도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왜 푹 쉬었는데도 여전히 피곤할까 의아해하면서 말이다.
물론 육체 피로는 몸을 움직이지 않고 내버려두면 어느 정도 회복된다. 하지만 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되면 이런 방식으로는 절대 회복되지 않는다. 단언컨대 무작정 가만히 누워 있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나 역시도 ‘꼼짝도 안 한 채 이불을 둘러쓰고 싶은 순간’이 없는 건 아니다. ‘이렇게 힘든데 뭘 더 어떻게 움직여?’ 의구심부터 든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힘들 때마다 속으로 이렇게 되뇌게 되었다. ‘아, 힘들다…… 걸어야겠다.’
나는 힘들수록 주저앉거나 눕기보다는 일단 일어나려 애쓴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고갈되었다는 느낌이 들 때 오히려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간다. 팔과 다리를 힘차게 흔들면서 온몸에 먼지처럼 달라붙은 귀찮음을 탁탁 털어내본다. 그렇게 걷다보면 녹슬어서 삐걱거리던 몸과 마음에 윤기가 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나타나는 증상을 잘 관찰해보자. 원래는 호기심이 솟고 흥미롭게 느껴지던 것들이 다 심드렁하다. 만사가 팍팍하게 느껴지고 별일 아닌데도 짜증스러워서 주변 사람들에게 뾰족하게 군다. 아주 작은 변수에도 절망적인 기분이 들어 눈앞이 캄캄해진다…… 이 모든 것은 내 몸과 마음이 나에게 ‘전환’과 ‘쉼’을 요구하는 사인이다. 이때 방구석에 가만히 눕거나 앉아서 그냥 나아지길 기다리면 머리는 무거워지고 기분은 점점 가라앉는다. 악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늪에 빠져들려 할 때는 변덕스러운 감정에 나를 맡겨둘 게 아니라 규칙적인 루틴을 정해놓고 내 몸과 일정을 거기에 맞추는 편이 좋다.
나는 사람이 그다지 강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여러 가지 요인들로 불안정해지기 쉬운 동물이다. 마치 날씨처럼 매일 다른 사건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우리의 몸과 마음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기란 쉽지 않다. 변화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물결에 배가 휩쓸려가서는 안 되므로 닻을 단단히 내려둘 필요가 있다. 나에겐 일상의 루틴이 닻의 기능을 한다.
위기상황에서도 매일 꾸준히 지켜온 루틴을 반복하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희미하게나마 보인다. 실제로 내가 아는 한 정신과 의사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환자들에게 그게 무엇이든 루틴을 정해놓고 어떤 기분이 들든 무조건 지킬 것을 권한다. 내가 지키는 루틴은 다음과 같다.
ㆍ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일단 러닝머신 위에 올라가 걸으며 몸을 푼다.
ㆍ 아침식사는 반드시 챙겨먹는다.
ㆍ 작업실이나 영화사로 출근하는 길엔 별일이 없는 한 걷는다.
루틴이란 내 신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얼마나 골치 아픈 사건이 일어났든 간에 일단 무조건 따르고 보는 것이다. 고민과 번뇌가 눈덩이처럼 커지기 전에 묶어두는 동아줄 같은 것이다.
루틴의 힘은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잠식하거나 의지력이 약해질 때, 우선 행동하게 하는 데 있다. 내 삶에 결정적인 문제가 닥친 때일수록 생각의 덩치를 키우지 말고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살다보면 그냥 놔둬야 풀리는 문제들이 있다. 어쩌면 인생에는 내가 굳이 휘젓지 말고 가만 두고 봐야 할 문제가 80퍼센트 이상인지도 모른다. 조바심이 나더라도 참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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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우, <걷는 사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