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231205

유연하고단단하게 2023. 12. 5. 20:03


출근하는 길 지하철 개찰구에서 서둘러 카드를 찍고 들어가려는 중이었다. 맞은 편에 선 피곤한 얼굴을 한 할머니가 당연하다는 듯 동시에 카드를 찍고 내 쪽으로 넘어 왔다. 양보를 고민하기 위한 찰나의 주저함이라고는 없는 행동이었기에 기분이 나빴다. 그와 동시에, 맞은 편에 상대방이 보이면 양보할지 고민한다는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할머니의 삶이 팍팍하고 여유롭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사실 그런 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조급하게 살아와서, 내 몫을 챙기기 급급해서 남에게 양보하고 아량을 베푼 경험을 거의 해 본 적 없는.

어제 회사 식당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거의 동시에 배식 줄을 선 사람이 있었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내 뒤에 설 것을 요구했다. 뒤늦게 양보해줘서 고맙다고 할 걸,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한참 뒤 배식을 마치고 밥을 먹으면서 떠올린 깨달음이었다.

나는 여유롭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다. 조급하고 참을성 없는 성격을 타고난 부분도 베푸는 성정을 갖추지 못한 데 한 몫 할 것이다. 가족들은 늘 서로를 탓했고 조금이라도 희생을 하면 그걸로 유세를 떨었다(특히 아빠가 그런 편이고, 나는 아빠의 성격을 많이 닮았다). 좀 더 여유롭고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더라면 우연히 마주친 타인에게 조건 없는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사람으로 자랐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책 읽는 것과 라디오 듣는 것을 좋아하고, 그 속에서 수많은 가르침과 깨달음을 얻으며 나의 부족함을 반추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부터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노력해야겠다. 미움 받을까 두려워 상대방을 먼저 미워하는 루저가 되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친절을 베푸는 연습을 해야겠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양보 잘하고 상냥하기로 유명한 할머니가 될 지도 모르니까. 저 분은 얼마나 풍족하고 여유롭게 자랐길래 저런 성정을 갖추신걸까, 하는 말을 듣게 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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