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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

유연하고단단하게 2023. 10. 17.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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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의 가격이나 사양, 무엇보다 마이크가 거기에 들인 정성에 대해서는 민영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마이크는 무엇이든 원하는 걸 갖기까지 신중하고 가진 다음부터는 소중히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상실감은 짐작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해야 할 때 편하다는 이유로 가까운 사람에게 그것을 전가하는 건 안이하고 옹졸한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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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세울 만한 스펙이 별로 없는 승아는 자기소개서를 쓸 때마다 글솜씨로 곧잘 자신을 포장하곤 했다. 그녀가 내세우는 장점은 주로 성실성과 적응력이었다. 그런데 무언가가 있다고 강조하는 건 원하는 다른 것이 없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이기 십상이다. 승아가 생각할 때 그것은 도전 정신과 창의력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할 수 있어!라고 하기보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할 수 없지, 라고 받아들이는 쪽이었다. 이해심이 많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자기 합리화의 유연함이 있었다. 사실 성실성과 적응력의 조합도 풀어 말하면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뜻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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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승아는 천진하다못해 눈치가 없었다. 돈가스냐 떡볶이냐 같은 사소한 일도 쉽게 결정 못해 일일이 민영에게 의지하는 한편으로 고집이 세고 인정 욕구가 강했다. 민영이 유학을 떠날 때 승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밤새 쓴 손 편지를 건네주었는데, 미국 친구가 생기면 자신처럼 평범한 소꿉친구 따위는 곧 잊어버릴 거라며 민영이 아니라는 말을 스무 번쯤 반복할 때까지 훌쩍임을 멈추지 않았다. 일주일분의 해독 주스라니. 손 편지처럼 고맙고 감동적이지만 그것을 영원히 간직하라는 말만큼이나 부담스러웠으며 또 궁금하지도 않았다. 친하다고 해서 비슷해질 필요는 없었다.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미소를 보내고 손을 흔들면 되었다. 민영은 그것을 납득시키면서 유지해야 하는 관계들이 피곤했고 적당한 기만으로 덮어두지 못하는 자신 역시 지겨웠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승아는 생각했다. 쟤는 어쩌면 저렇게 변함없이 자기 위주일까. 집이 더운 것만 보이고 내가 그 더위 속에서 종일 일한 것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지. 자기 집을 청소하고 자기를 위해 주스를 만든 것은 중요하지 않고 자기 방식과 다르다는 점만이 문제인 거지. 고생 좀 했나 싶더니 변한 건 하나도 없네. 그렇게 독립적인 척하면서 부모가 주는 학비로 공부하고 무슨 일이든 친구들보다 높은 점수를 따지 않으면 못 참고.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사진도 결국은 자신 있는 답안지 제출과 스펙 과시 같은 거였나. 그 사진이 아니었으면 승아는 이 좁고 낡은 집과 더위에 갇혀 집안일을 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민영의 이기심에 상처를 받고도 또 이렇게 당하고 있는 자신의 한결같은 성실성과 적응력에 넌더리가 난 승아는 방으로 들어가서 행어에 걸어놓았던 자신의 옷과 마트에서 사온 초콜릿이며 과자들을 캐리어 안에 쓸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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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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