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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작별 인사

유연하고단단하게 2022. 6. 26.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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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아직 생각이 다 정리되지 않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저는 민이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야기라......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들의 무의미한 인생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낸 발명품이 아닐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높은 수준의 의식과 언어를 가진 존재만이 이야기를 만들 수 있고, 그 이야기가 의식을 더 높은 수준으로 고양시킨다고 믿고 있어요."
"제 생각은 당신과 좀 다릅니다. 이야기는 오히려 인간을 더 집단적이고 폭력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자기 의사와 상관 없이 태어난 인간들은 아무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다가 이야기라는 매우 중독성이 강한 마약을 만들어냈습니다. 이야기는 인간이 겪는 고통에 의미가 있다고 은연 중에 말합니다. 가장 많은 인간이 믿었던 두 종교는 모두 최초의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통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모든 이야기가 인간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신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고통만 주신다고도 합니다. 저는 거기까지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마취제는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이야기는 인간의 공감 능력을 이용해 인간을 끼리끼리 결속시킵니다. 같은 이야기를 믿는 인간들은 그 이야기를 믿지 않는 다른 인간들에게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굽니다. 전쟁이 벌어지고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들이 말하는 자아니 존재니 의식이니 이야기니 하는 것들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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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의식이 인공지능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고 내가 원하기만 하면 영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나는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여기고 있을 때 즐기던 것들에 흥미를 잃어갔다. 더이상 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것들은 모두 필멸하는 인간들을 위한 송가였다. 생의 유한성이라는 배음이 깔려 있지 않다면 감동도 감흥도 없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땜누에, 생이 한 번뿐이기 떄문에 인간들에게는 모든 것이 절실했던 것이다. 이야기는  '살 수 도 있었던 삶'을 상상 속에서 살아보게 해주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삶을 수백 배 수천 배로 증폭시켜주는 놀라운 장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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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우주정신은 절대적인 의식과는 달리 생명체로 태어나 개별적인 자아로 존재하는 것도 허용하는거야. 우리는 우주정신의 일부이지만 지금의 너와 나 그리고 민이처럼 개별적인 의식을 가진 존재로 세상에 태어날 수도 있어. 그리고 생명체 중의 극소수는 우주와 우주정신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우리는 별 볼 일 없는 존재이고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전혀 모르지만 우주 정신이 그렇게 한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어."
개별적인 의식을 가지고 살아 있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이니 너무나 짧은 이 찰나의 생을 통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존재가 되도록 분투하고 우주의 원리를 더 깊이 깨우치려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선이에게는그래서 모든 생명이 소중했다. 
"달마가 궁극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이야기가 없는 의식이야. 달마는 그걸 더 높은 차원의 의식이라고 보는 것 같아. 휴머노이드의 의식을 모두 클라우드와 네트워크로 업로드해서 하나의 거대한 의식으로 통합하려는 거잖아? 그런 의식은 탄생도, 고통도, 죽음도, 개별성도 없어.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다 사라지고 약점도 없을 거야. 인류는 오랫동안 왜 외계인들이 우리를 찾아오지 않을까 궁금해했잖아? 나는 그들도 이야기 없는 의식의 세계로 이미 진화했다고 생각해. 삶과 죽음의 문제를 오래전에 초월했으니까 굳이 다른 행성을 찾아 떠날 필요가 없는 거야. 그런데 아직 우리는 그 단계에 이르지 않았어. 아직는 나도 있고 너도 있어. 나의 이야기도 있고 너의 이야기도 있어. 우리는 모두 탄생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나는 한 편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너와 나의 이야기가 아직 미완성이듯, 민이의 이야기도 아직 끝나지 않았어. 끝이 오면 너도 나도 그게 끝이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을거야. 난 그렇게 믿어. 그런데 민이는 아직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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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몸이 사라지고 나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을 몸으로 해왔는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몸 없이는 감정다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볼에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이 없고, 붉게 물든 장엄한 노을도 볼 수가 없고, 손에 와 닿는 부드러운 고양이 털의 감촉도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채 동이 트지 않은 휴먼매터스 캠퍼스의 산책로를 달리던 상쾌한 아침들을 생각했다. 몸이 지칠 때 나의 정신은 휴식할 수 있었다. 팔과 다리가 쉴 새 없이 움직일 때 비로소 생각들을 멈출 수 있었다는 것을 몸이 없어지고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 김영하, <작별인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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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마지막 장면. 죽음에 대해 종교가 아닌 다른 태도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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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골의 버튼을 누르면 구조는 되겠지만 내 개별적 자아는 지워지고 내 의식과 경험, 프로그램도 인고지능에 흡수돼버릴 것이다. 그러면 나는 더이상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고 나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것조차 잊고 통합된 의식, 기계지능의 일부로 영생하게 될 것이다. 나는 버튼을 누르지 않기로 했다. 팔을 내려놓았다. 선이의 말이 맞기를 바랬던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야겠지만, 그리고 만나도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어디서든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꿈도 없는 깊고 깊은 잠을 자면 된다.

나와 인연을 맺었던 존재들은 빠짐없이 이미 우주의 일부로 돌아갔다. 우주는 생명을 만들고 생명은 의식을 창조하고 의식은 영속한다. 선이가 늘 하던 이 말을 믿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파랗기만 하던 오늘이 서서히 오렌지빛으로 물들고 있다. 노을이 진하니 내일은 맑을 것 같다. 그리고 난 그 내일을 보지 못할 것이다. 끈질기게 붙어 있던 의식이 드디어 나를 떠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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