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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만들어낸 이야기인지 구별하는 능력을 잃었습니다. 그 결과 무수한 사람이 국가나 사회, 그리고 신이라는 상상의 산물을 위해 전장에 나가거나 수백만 명을 마구잡이로 학살했습니다. 이런 사태에 이르지 않으려면 우선 눈앞에 보이는 것이 현실인지 허구인지 구별하고, 이를 이용할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현실과 허구를 구별할 수 있을까요?
최선의 방법은 대상으로 삼는 것이 고통을 느끼는지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고통은 세상에서 가장 현실적입니다. 일례로 국가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지요. 전쟁에서 패해도 괴로움을 느끼는 주체는 국가가 아니라 국민입니다. 기업도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거액의 손실액이 발생하면 기업이 아니라 그 조직에 속한 경영자나 사원이 초조해합니다.
국가가 전쟁에 패해서 고통스러워한다는 말은 단순한 은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국가는 감정이 없으니 괴롭지 않을뿐더러 침울해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상상 속에서 그렇게 묘사될 뿐입니다. 은행이나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토요타가 거금을 잃어도 토요타라는 존재 자체는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법적 허구에 불과하니까요. 대조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은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느끼는 고통은 은유가 아니라 실제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허구에 의해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일이 어리석게 보입니다. 인간 사회가 잘 작동하려면 허구가 필요하지만, 허구를 도구로 보지 않고 그것을 목적이나 의미로 받아들이는 순간 초래될 고통은 실존하는 우리들의 몫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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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달리 과학은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그래서 연구를 계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과학의 세계에서는 무지를 감추기 위해 이야기를 날조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이런 태도가 중세와 근대를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이며 그렇기에 근대에 이르러 과학기술이 발전할 수 있었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이 권리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리고 국가에 의해 희생되며 돈이나 회사 문제로 고민하다 자살까지 합니다. 말하자면 허구 때문에 현실에서 목숨을 잃는 것인데, 이런 현상을 어떻게 봅니까?
앞서 말했듯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과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이야기를 구별하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이야기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지요. 신에 관한 이야기, 국가에 관한 이야기, 또 인권에 관한 이야기 등 각종 이야기들에 마음을 빼앗겨버립니다. 그 이야기는 다시 자기 정체성이나 인생의 의미와 연결되고요. 일단 이야기에 빠지면 사람들은 그 내용과 상관없이 이야기를 지키기 위해 행동합니다. 고통과 희생을 감내하면서까지 전쟁에 나가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더군다나 오늘날은 컴퓨터나 스마트폰 등 새로운 기술이 진보하면서 현실과 허구를 구별하기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가상공간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이용해 수시로 이메일을 확인하고 다른 시공간에서 일어난 일을 열심히 검색할수록 실제 일어나는 일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보는 능력은 상실됩니다.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는 눈앞의 세계와 접촉할 기회를 잃어가는 것이죠.
경제적인 면에서는 바람직한 현상일지도 모르지요. 당신이 쉬지 않고 이메일을 확인하고 어디서든 전화를 받는다면 그만큼 생산성이 높아지는 거니까 회사 입장에서는 좋은 일일 테죠. 그러나 그런 삶에서는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자기 몸이나 감각이 눈앞에 있는 현실과 만나지 못한다면 정신은 방황하고 행복한 삶도 누리기 어려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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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 외 7인,
<초예측 : 세계 석학 8인에게 인류의 미래를 묻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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