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상관 없는 거 아닌가?

유연하고단단하게 2020. 10. 15. 13:30

-
물론 멀쩡할 때에는 용기가 나지 않아 하지 못했던 말을 술에 취하면 할 수 있게 되는 일이 종종 있기는 하다. 뇌에서 술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곳 중 하나가 자기억제를 관장하는 부위라고 하니, 자연스러운 일일 테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밝히는 마음이 더 ‘진실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야기를 꺼내기 주저하는 마음도 어쨌든 진심이다. 그 마음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진실된 대화란 그렇게 상충하는 여러 진심들을 빠짐없이 마주한 후 적절한 방식으로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뇌의 일부를 마비시키고 특정한 진심만을 꺼내놓는 것과는 다르다.


-
그저 멍하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것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냐고 물을지 모르나,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확실히 그렇지 않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때는, 흙탕물이 서서히 흙과 물로 분리되듯 시끄러운 생각들이 점차 가라앉고 하고 싶은 바가 뚜렷해진다. 하지만 스마트폰을 보다가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은 아직 없다. 대신 뇌의 한 근육이 미세하게, 하지만 지속적으로 시달리는 기분이다. 회복과 피로가 불균형하게 뒤섞이는 느낌이랄까.



-
몇몇 이들의 카메라에 남아 있긴 하겠지만 그 외엔 별다른 기록 없이 그대로 증발해버린 순간이다. 카메라로 찍어도, 인스타그램에 올려도, 유튜브 콘텐츠로 만들어도, 삶은 결국 증발한다. 일거수일투족을 촬영해 몇 시간짜리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넷플릭스에 공개한 인생이라 해도 예외는 될 수 없다. 비록 〈싸구려 커피〉는 그 당시의 즐거움을 잃었지만, 나의 일상에는 비슷한 즐거움이 얼마든지 남아 있다. 굳이 카메라로 찍고 온라인에 업로드해 많은 이들과 공유하지 않아도 좋은, 그런 종류의 즐거움 말이다



-
아마 남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고 나 자신에게 묻는 일이 많다. 새로운 커리어를 위해 혼자 이래저래 고민하는 것이 주된 일상인 요즘이라 더더욱 자주 그러게 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나는 답을 하지 못한다. 그럴 때면 막막해진다. 빨리 뭘 어떻게 좀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조바심이 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여태껏 살면서, 멋진 순간들은 다 내 의도나 기대와는 무관하게 찾아왔다. 영화를 보며 사랑을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것도, 내 인생에 단 한 번 만년설 위를 걸어본 것도, 내 노래로 무대에서 수만 관객의 환호를 받은 것도, 내가 기억하는 가장 깊었던 사랑의 순간들도, 그리고 창문 밖으로 가슴 시릴 만큼 파란 일요일의 하늘을 바라보며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말이다. 나는 다시 한번 망망대해 위의 서퍼를 떠올린다. 대단한 항해를 계획하지 않아도 파도는 온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파도를 맞이하고 그 위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전부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푸른 바다 위를 질주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
장기하, <상관없는 거 아닌가?> 중에서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0) 2020.10.26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0) 2020.10.24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0) 2020.09.23
그래왔던것처럼  (0) 2020.09.23
보통의 언어들  (0) 2020.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