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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 괴로운 이유는 우리의 믿음, 즉 ‘노력’이 우리를 자주 배신하기 때문이다. 나는 죽어라 열심히 노력하는데 고작 이 정도고, 누구는 아무런 노력을 안 하고도 많은 걸 가져서다. 분명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배웠는데, 또 노력하면 다 이룰 수 있다고 배웠는데 이상하다. 뭔가 속은 것 같다. 잘못 살아온 것만 같다. 그렇다고 노력을 멈출 수도 없다. 노력하지 않으면 그나마 지금 정도도 유지하지 못할 것 같다. 어떻게 사는 게 맞는지 알 수 없어서 괴롭다.
왜 노력이 우리를 배신하는지, 그럼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물어도 난 답을 알지 못한다. 다만 괴로움을 줄이는 법은 안다. 분하지만 ‘인정’해버리는 것이다.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고, 노력한 만큼 보상이 없을 수도, 노력한 것에 비해 큰 성과가 있을 수도 있다’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괴로움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다.
내가 ‘이만큼’ 노력했으니 반드시 ‘이만큼’의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괴로움의 시작이다. 보상은 언제나 노력한 양과 동일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노력한 것보다 작게 혹은 더 크게 주어진다. 어쩌면 아예 보상이 없을 수도 있다.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노력한 것에 비해 큰 성과를 얻은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비난하지 말고 그 성과를 인정해주자. 그것은 나 역시 노력에 비해 큰 성과를 얻을 수도, 노력하지 않았는데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이야기니까. 질투로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그런 행운을 인정하면 더 많은 행운이 찾아온다나 어쩐다나. 믿거나 말거나.
이처럼 노력은 항상 우리를 배신하기 때문에 노력하면 할수록 자꾸 억울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소설 속 여자처럼 말이다. 하루키는 억울해하는 우리의 마음을 이상한 방식으로 위로한다.
원래 인생은 공평하지 않아. 노력으로 다 된다는 말도 거짓말이지.
알겠어? 네 노력이 부족한 탓이 아니라는 이야기야.
여기엔 어떠한 해답도 없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나에겐 엄청난 위로가 된다. 이러니 하루키를 좋아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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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하고 싶어서,
틀리고 싶지 않아서.
이런 마음 때문에 힘이 들어간다. 힘이 들어간다는 건 경직된다는 것,유연하지 않다는 것,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 욕심을 내고 있다는 것,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이다.
인생을 막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인생 앞에선 누구나 진지해지기 마련이다. 잘 살고 싶어서 필사적이다. 이를 악물고, 두 손을 꽉 쥐니 저절로 힘이 들어간다. 힘을 주고 버티느라 어깨가 단단하게 뭉친다.
힘을 빼면 넘어지고, 뒤처질까 봐 힘을 뺄 생각을 못 했다. 부끄럽지만 겁을 먹었다. 힘을 뺀다는 건 딱딱하지 않다는 것, 유연하다는 것, 자연스럽다는 것, 욕심을 내지 않는다는 것, 겁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겁을 내며 살았는데, 이젠 겁낼 것이 없다. 어차피 망친 그림이니까.(웃음) 그런 이유로, 젊을 땐 잘 안 되던 힘 빼기가 이제 조금은 될 것 같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는 것은 아니니 막 그려볼 생각이다. 가벼운 마음이면 된다. 내 인생을 대단하게 만들어보겠다는 욕심을 이제 조금 내려놓았다.
자, 우리 힘내지 말고 힘을 빼자. 뭉친 근육을 풀어 유연하게 만들자. 쉴 새 없이 날아드는 펀치를 가만히 서서 맞고만 있지 말고 가볍게 피해보자.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겁내지 말고 한 걸음 내디뎌보자. 넘어져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일어나보자.
괜찮아, 자연스러웠어.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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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인생을 수수께끼에 비교하곤 한다. 우리 앞에 놓인 알 듯 말 듯 한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이 꼭 수수께끼를 닮았다. 저마다 정답을 찾으려 애를 쓰지만, 풀면 풀수록 더 미궁으로 빠지는 것 같다는 점이 이 수수께끼의 함정이다.
정답지가 있거나 답을 알려줄 사람이 있다면 한결 수월할 텐데, 그런 건 없다. 오로지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답이 맞는지 아닌지 확인해줄 사람도 없다. 응? 도대체 무슨 문제가 이 따위야?
누군가는 답을 찾았다고 이야기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게 답인가 싶다가도 이내 ‘이게 아닌가?’ 하고 의심이 든다. 정말 정답이란 게 있다면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인생을 끌어안고 절절매지는 않았을 거다. 정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수수께끼의 본질은 재미에 있다.
그렇다. 재미있자고 던진 문제에 우리가 너무 죽자고 덤빈 건 아닐까? 답을 찾는 데만 집중하느라 문제를 푸는 재미를 잃어버린 건 아닐까? 수수께끼는 꼭 맞춰야 하는 게 아니다. 틀려도 재미있는 게 수수께끼 아니던가. 그리고 이 수수께끼는 어차피 정답이 없다.
이자벨 위페르가 주연한 영화 〈엘르〉를 봤다.
이 영화의 시작은 주인공인 ‘미셸’이 집에 침입한 괴한에게 강간을 당하는 끔찍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더 충격적인 것은 범인이 떠난 후에 그녀가 한 행동이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옷을 추스르고, 부서진 그릇들을 치우고, 목욕을 한다. 그리고 일상적인 일을 하고 출근을 한다. 그녀의 태도는 너무도 평온하다(그렇다고 그녀의 고통과 피해가 가볍다는 것은 아니다).
그 사건 이후로도 미셸에겐 풀어야 할 수많은 문제가 들이닥친다. 그녀가 대표로 있는 회사 내부에선 누군가 그녀를 모욕하는 영상을 퍼뜨리고,하나밖에 없는 조금 모자란(?) 아들은 애인에게 이용당하고, 감옥에 있는 그녀의 아버지 때문에 잊었던 과거의 상처들이 되살아난다. 그런 문제들에도 그녀는 담담하다. 다른 사람 같으면 울고불고 난리가 났을 일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그런 그녀의 리액션이 이 영화를 끌고 가는 원동력이다. 그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과연 그녀는 어떻게 이 수많은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인가? 궁금해서 계속 지켜보게 된다.
미셸은 울부짖거나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인물이아니다. 자신을 강간한 범인을 찾고,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려 능동적으로 행동한다. 하지만 문제에 매달리지는 않는다. 그녀는 그 문제들 때문에 결코 일상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어찌 보면 문제들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급할 거 없어, 어떻게 되나 두고 보자.’라는 식이다. 그런데 신기한 건 거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문제들이 해결되는 방식은 인상적이다. 주인공의 치열한 노력과 집념으로 문제들이 해결되는 일반적인 스릴러와는 달리 저절로 해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나 아주 작은 일만 했는데 문제들이 살아 움직이듯 해결된다. 혹은 주인공이 의도했던 방향과는 다르게 일이 흘러가 해결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해결이 황당하거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인생은 절대 단순하지 않다. 나 혼자서 다 풀어낼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미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걸까? 그녀의 초연한 태도는 거기서 나온 걸까?
가끔은 인생에 묻고 싶어진다. 왜 이렇게 끝도 없이 문제들을 던져주냐고. 풀어도 풀어도 끝도 없고, 답도 없다. 이쯤 되니 인생이 하나의 농담처럼 느껴진다. 정답 없는 수수께끼 같은 농담 말이다. 농담을 걸어온다면 농담으로 받아쳐주자.
심각할 필요 없다. 매번 진지할 필요도 없다. 답을 찾을 필요는 더더욱 없다. 농담을 못 받아치고 심각하게 대답하는 것처럼 센스 없게 살고 싶지 않다.
내 미래는 여전히 불안하고 현실은 궁상맞지만 과거처럼 비관적으로 반응하지 않겠다. 이건 ‘답’이 아니라 ‘리액션’이 중요한 시험이니까. 내 리액션은 괜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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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는데, 이 환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이 커질수록 괴로움이 커진다는 이야기다. 자신이 만든 환상 속의 나는 대단한 사람인데, 현실의 나는 초라하고 별 볼 일 없고 인정도 못 받으니 현실의 내 모습을 점점 미워하게 되고 못마땅하여 보기 싫어진단다.
고백하자면 내가 바로 자신을 과대평가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나는 내가 대단한 사람이며 앞으로 그렇게 될 거라고 굳게 믿었다. 나는 더 의미 있고 생산적인 일을 할 사람이며 남들과 똑같이 아등바등 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들은 별 의미 없고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 심지어 돈도 남들처럼 많이 못 버니 불만이 쌓였다. 매일 힘들게 사는데도 환상 속 내 모습에 한 걸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기분이 들어 괴롭고 조급하고 늘 못마땅했다. 급기야 무언가 잘못됐다며 집 안에만 틀어박혀 3년간 도(?)를 닦았으니 나는 중증 과대평가 환자가 분명했다. 3년간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은 뭘까',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뭘까', '인간은 왜 사는가' 같은 공허한 질문을 수도 없이 반복한 끝에 나는 환상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내가 존재하는 건 그냥 태어났기 때문이고 나만의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나는 그리 대단한 인간이 아니고 그냥 평범하거나 조금 못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가진 것에 비해 욕심을 부렸다는 걸 받아들였다.
나는 그때 내가 별 볼 일 없는 존재라는 걸 스스로 인정했기에 내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라 생각했는데, 실은 반대로 그 때부터 자존감이 높아진 것 같다. 실제로 그 이후 나는 조금씩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 갔다.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알고, 일이나 삶에서 큰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살면서 처음으로 행복하다는 기분을 느꼈던 것도 그 무렵이지 싶다. 뭐지? 상황이 크게 나아진 것도 없는데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 나는 처음 느껴보는 낯선 감정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나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때가 자존감이 가장 낮았고, 나 자신이 별거 아니라고 인정하고 나서야 자존감이 지금의 '보통' 수준으로 올라온 것이니 인생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아까는 부인했지만 생각해보면 내 자존감은 딱 보통 수준이 맞는 것 같다. 현재 내 모습에 대체로 만족하지만 완벽하게 만족하는 것은 아니니까. 내 마음 속엔 현실이 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직도 있다. 내가 만든 환상의 모습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예전처럼 괴리감이 큰 정도는 아니라 괜찮다. 대단한 모습의 나를 바라는 것도 아니니 이 정도 욕심은 가지고 살고 싶다. 높은 자존감이면 좋겠지만 보통 수준의 자존감만 되어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나는 내 보통의 자존감에 만족한다. 고로 여전히 자존감을 높이려 노력할 생각은 없다.
낮은 자존감이 문제가 된다면 노력해서 높여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노력이 또 다른 스트레스가 되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이 성공한다고 해서 자존감을 높이려고 하는 거라면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 자존감은 그런 식으론 절대 높아지지 않을 것이다. 자존감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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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가장 빨리 불행하게 만드는 방법을 찾고 있다면 '비교'를 추천한다. 그건 실패가 없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남들과 나를 비교하는 짓을 하지 않으려고 주의를 기울인다. 굳이 사서 불행해지고 싶지 않기 떄문에 내 삶이 남들과 다르다는 데에 불안함을 느끼기보다는 자부심을 가지려고 한다. 이렇게 유니크한 삶. 아무나 못 살아보는 삶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모두의 삶은 유니크하다. 세상에 똑같은 삶이란 없다.
물론 비교하지 않는 삶을 실천하는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마음을 잘 다스리며 살다가도 갑자기 외부로부터 훅 들어오는 공격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일종의 외부의 적인 셈인데, 그 적의 이름은 엄마 친구 아들(딸), 엄친아(엄친딸)다.
능력 되고, 외모 되고, 거기에 성격까지 좋은 인간들은 우리 주변에도 많지만 엄친아(엄친딸)들이 특히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이유는 그들이 바로 부모님 친구의 아들, 딸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입에서 "마크 버커버그는 페이스북으로 돈 많이 벌었다더라. 넌 뭐니?" 같은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더 잘난 인간들이 있는데, 왜 유독 친구 자식들이 부모님을 괴롭게 하는 것일까?
마크 저커버그는 (물론 엄청 부럽기는 하지만) 우리를 괴롭게 하지 않는다. 정작 우리를 극심한 질투심에 휩싸이게 하는 건 바로 나와 동등하거나 나보다 조금 못났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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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다른 이들의 결과물을 부러워했다.
'이렇게나 멋진 그림을 그리다니.'
'어떻게 이런 완벽한 소설을 쓸 수가 있지?'
'저 사람이 가진 명성이 부러워.'
나도 저렇게 돼야지.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어. 그렇게 동경하는 사람들을 흉내 내 여러 시도를 해봤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당연했다. 그들이 몇 년, 길게는 몇십 년 걸려 만들어 낸 결과를 빨리 얻으려 했으니 잘 될리가 없었다. 마음은 항상 조급했고, 빨리 결과가 나오지 않으니 '난 재능이 없나 봐'라는 생각으로 쉽게 포기하기 일쑤였다.
무언가를 하면서 결과를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결과에만 관심이 있었고, 과정은 그 결과를 얻기 위해 견뎌야 하는 인내의 시간 정도로 생각했다. 과정 그 자체로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망각한 채 말이다. 그러니 쉽게 지칠 수밖에. 재미없는 걸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내가 부러워했던 사람들은 과정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나는 항상 과정은 건너뛰고 결과를 바로 얻고 싶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과정 없인 결과도 없다. 그리고 결과만을 바라보고 달려가면 과정이 괴롭고 힘들다. 꼭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보장도 없고.
똑같은 일을 해도 어떤 사람은 힘들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취향이나 성격의 차이일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이 그 일을 대하는 태도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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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런데 이 '열심히'라는 말에는 싫은 걸 참고 해낸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즐겁지가 않다.
그래서 열심히 살면 힘들다. 그건 견디는 삶이니까.
같은 일도 이왕이면 '열심히'보다는 '재밌게'가 낫지 않을까? 생각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삶이 달라질 거라고 말하면 너무 설득력이 떨어지려나?
흔하고 오글거려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말이 있는데, 결국 내가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
이 명언은 다 좋은데 이게 문제다. 꼭 누굴 이기고 싶어서 즐기는 건 아니다. 그냥 재미있게 살고 싶은 거다. 누굴 이기는 게 목적이 되는 순간 절대로 즐길 수 없을걸? 아무튼.
이제 열심히 사는 인생은 끝이다. 견디는 삶은 충분히 살았다. 지금부터의 삶은 결과를 위해 견디는 삶이어서는 안 된다. 과정 자체가 즐거움이다. 그래서 인생이 재미있다. 앞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뿅 하고 건너뛰고 싶은 시간이 아닌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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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하면 후기가 쏟아지는 세상이 되어 확실히 편리해졌다. 그리고 거기에 의존하는 만큼 실패도 줄었다. 하지만 실패가 줄어든만큼 즐거움도 같이 줄어들었다. 내가 선택하는 즐거움, 미지의 것이 주는 즐거움 말이다.
제목과 포스터만 보고 마음이 설레어 무작정 극장에 들어가 관람했던 영화들. 낯선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수수하고 단정한 간판이 마음에 들어 들어갔던 선술집. 작가도 모르고 내용도 모르는데 단순히 표지가 마음에 들어 집어든 책.
그런 것들은 최고의 선택이 아니었음에도 유독 기억에 오래 남아 나를 미소 짓게 한다. 그런 선택에는 무모하고 위험한 매혹이 있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믿음과 그 선택에 책임을 지려는 용기가 있다. 당연히 실패할 확률도 높지만 성공했을 때 가지는 성취감도 크다. 그건 누구의 것도 아닌 오롯이 내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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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이 완전히 불안하지 않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나도 종종 불안하다. 하지만 남들보다 뒤처진다는 불안은 크게 없다. 어차피 나는 느리니까. 그리고 천천히 가다 보니 남들은 저만치 앞서 뛰어가 버려서 어느 쪽으로 따라가야 하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어디로 갔든 상관없이 그냥 내 길을 걸어갈 뿐이다. 같은 방향으로 가지 않으니 앞서가네, 뒤처지네 하는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어버렸다.
혹시 지금 뒤처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하다면 아마도 뒤처진 게 맞을 거다. 하지만 뒤쫓을 필요는 없다. 자신만의 속도와 길을 찾는 게 더 중요하다. 느린 건 창피한 게 아니다. 인정하자. 우린 뒤처졌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런 뻔뻔함이 너무 좋다.
이왕 늦은 거 천천히 가면 어떨까? 인생도 더 길어졌는데 빨리 가서 뭐 하려고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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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네."
우리는 늘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괴로워한다. 노력을 안 했으면 모를까 나름 열심히 노력도 했건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더 괴롭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게 정상이다. 무슨 소리냐고?
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원하고 꿈꾸는 대로 모든 게 다 이루어진다고 생각해보자. 돈이 많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부자가 되고,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누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누가 죽는다? 그런 능력을 두고 우리는 정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건 초능력이다. 원래 세상 일은 내 맘대로 안 되는 게 정상이고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괴로워한다.
짐 캐리가 주연한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휴가를 떠난 신(神)을 대신해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지게 된 브루스. 사람들의 소원을 일일이 읽기 귀찮았던 브루스는 모든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다. 그 결과 세상은 하루 아침에 혼란에 빠지고 아수라장이 된다. 수십만 명의 사람이 동시에 복권 1등에 당첨되고, 1등 당첨금이 고작 17달러인 것에 분노한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켜 도시는 마비가 된다.
이걸 보면 모든 사람의 소원이 이루어질 수도 없지만 이루어져서도 안된다는 생각이 번쩍 든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이런 일은 없어야 한다. 눈치 챈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이 모양 이 꼴인 건 다 세계 평화를 위해서라고나 할까.
인생이, 주변 사람들이, 세상이, 모든 게 내 마음대로 안 돼서 힘들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분명 그 사람을 욕심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어떻게 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되기를 바라느냐고 속으로 욕을 하겠지. 그런데 내가 그러고 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나는 너무 욕심을 부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왜 나는 이렇게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났을까? 왜 나는 이렇게 생긴 걸까? 왜 나는 이렇게 능력이 없는 걸까? 왜 나는....... 따지고 보니 내가 원하는 대로 된 건 거의 없다.
어쩌면 내가 선택할 수 있고 이룰 수 있는 건 거의 없는 게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삶이 잘못되어가고 있는 건 아니다. 우리의 삶은 지극히 정상이다. 원하는 대로 다 되지 않는 지금이 정상이다. 괴로워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뭐야, 괜히 속상했잖아.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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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던 대로 되지 않았으니 내 인생은 실패한 걸까?"
누구나 꿈꾸는 모습이 있다. 몇몇 사람은 그 모습을 이루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꿈을 이루지 못하고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꿩' 대신 주어진 '닭' 같은 삶인 것이다.
기대했던 것에 못 미치는 닭을 앞에 두고 우리는 고민에 빠진다. 누군가는 닭을 꿩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누군가는 마지못해 닭을 먹는다. 또 누군가는 이게 아니라며 닭을 아예 외면해버린다.
내 삶을 고통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꿈꾸던 것들을 잡으려 애를 썼지만 잡히지 않고 자꾸 멀어져만 갔다. 꿈을 이루지 못하면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행복해지기 위해 더욱 노력했다. 하지만 계속 불행했다. 그랬던 내가 최근 몇 년간은 행복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됐다. 상황이 나아져서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부정하며 노력하는 대신 지금의 나를 좋아해주고 인정하기로 마음먹었기 떄문이다. 지금의 내 삶도 꽤 괜찮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끼기 시작했다. 겨우 이런 거에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만약 노력해서 꿈꾸던 모습이 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단, 열심히 노력하는 중에도 삶은 이어진다. 아직 꿈꾸던 모습이 되지 못한 삶을 보며 괴로워하진 않았으면 한다.
기대에 못 미치는 지금의 내 모습도 꽤 괜찮다고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꿈을 이뤄야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건 착각이다.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행복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꿈이 뭐라고. 꿈을 이룬다면 정말 좋겠지만 이루지 못해도 그만이다. '에이, 아쉽다' 정도로 훌훌 털고 지금 주어진 삶에서 행복을 찾아 누리기에도 짧은 생이다. 꿈꾸던 대로 되지 못했다고 실패한 인생은 아니다. 실패한 인생이란 없다.
누군가는 루저들이나 하는 '자기 위로', '자기합리화'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계속 자신을 채찍질해야 한다고 다그치겠지. 그렇게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자기 위로'나 '자기합리화'가 나쁜 것일까? 자기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려 스스로 위로하고 합리화하는게 잘못된 것일까?
나는 내 삶을 더 사랑할 수 있게만 해준다면 몇 천 번이라도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행복하게 살 생각이다.
내가 내 인생을 사랑하지 않으면 도대체 누가 내 인생을 사랑해준단 말인다.
꿈꾸던 대로 되지 못했다고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끌어안고 계속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까 이건 관점의 차이다.
'꿩 대신 닭'이라고 하면 뭔가 덜 좋은 걸 얻은 것 같지만 '꿩 대신 치킨'이라고 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치킨은 사랑이니까. 당장이라도 맥주 캔을 따고 싶을 만큼 흥분된다. 지금 우리의 삶은 닭이 아니라 치킨이다.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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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완 에세이,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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