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붉은 선

유연하고단단하게 2020. 8. 27. 11:52


이제 나는 포르노를 봐도 흥분되지 않는다. 나를 흥분시키는 건 삶의 부피, 투명한 눈빛, 나비의 날갯짓 같은 상상이다. 섹스는 함께 즐기는 상쾌한 스포츠가 될 수도 있고, 깊고 고요한 명상이 될 수도 있다. 성기가 섹스의 중심이 아니어도 좋았다. 상대의 발이나 무릎에 키스를 하거나 내 손가락 사이사이와 발등을 만져줄 때 짜릿함을 느꼈다. 어디든지, 언제든지 예민한 촉수로 변할 수 있는 감각 덩어리. 야동보다 더 야한 것들이 내 몸과 세계에 이렇게나 많다!

섹스만큼 이 사회에서 왜곡된 감각이 또 있을까. 섹스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온전한 감각의 회복이. 섹스에 묻은 때가 너무 많다.

포르노 섹스 서사를 즐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섹스가 아니라는 걸 아는 건 중요하다. 포르노 서사에 갇혀 지극히 협소한 쾌락 안에서만 노니는 교감이 안타깝다. 포르노 서사를 걷어낸 섹스는 너와 나 이외의 모든 타자와 관계 맺는 감각의 개성을 드러낸다. 인간은 몸의 동물, 어쩔 수 없는 감각의 존재다. 가장 밀접한 감각의 교감인 섹스에서 어떻게 타자와 관계를 맺고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가는 그의 삶의 방식과 닮아 있다. 섹스에서 다른 방식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다면, 다른 삶의 가능성도 풍부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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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희, <붉은 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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