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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성공적인 결혼의 필수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심시선 폭력성이나 비틀린 구석이 없는 상대와 좋은 섹스.
질문자 흥미로운 대화나 서로에 대한 이해 같은 건요?
심시선 아이, 남편들이랑 무슨 대화를 해요? 그네들은 렌즈가 하나 빠졌어. 세상을 우리처럼 못봐요. 나를 해칠까 불안하지 않은 상대와 하는 안전한 섹스, 점점 좋아지는 섹스 정도가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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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사람의 인격을 조각한다. 조각하다가 아예 부숴버리기도 하지만 폭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폭력의 기미를 감지할 수 있게 되는데, 그렇게 얻은 감지력을 유용하게 쓰는 사람도 있고 절망해 방치해버리는 사람도 있어서 한 가지 결로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치욕스러운 경험도 요긴한 자원으로 썼으니 아주 무른 편은 아니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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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은이 가장 좋아하는 유물은 부여박물관의 한 토기였다. 화려해서도 아니고 희귀해서도 아니고 명은과 개인적인 연관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어느 박물관이든 제일 첫 관에 배치하는 단순한 형태의 토기였는데, 가마의 불 속에서 엉거주춤 내려앉은 형태였다. 못 쓸 정도로 망가진 것은 아니고 윗부분이 모호하게 찌그러진 형태였는데 아마 토기 장인은 '에이, 만든 김에 그냥 쓰지, 뭐' 정도로 넘겼을 것이다. 그 실패작이 천 오백 년을 살아남아 박물관에 자리잡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테고 말이다. 훨씬 잘 만든 토기가 많았을텐데 하필 그 토기가 발굴되고 보존되어서 유리함 안에 전시된 걸 4세기의 토기 장인이 알게 된다면 얼마나 황당해하고 민망해할까? 천 오백 년짜리 유머였다. 알아채고 웃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 시간의 시시한 웃음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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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철쭉이 흔하고 시시한 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봄이 와도 철쭉을 대단히 반기는 이는 없지 않나요? 그런데 어느 날 밤 산책을 나갔다가 송이째 떨어져 있는 흰 철쭉을 보았고, 지나가던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그 꽃을 비추는 순간 그것이 살면서 본 가장 아름다운 흰색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빛날 준비가 되어 있어서 거의 스스로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흰색요. 그것을 칠십대에야 깨달았으니, 늦어도 엄청 늦은 거지요.
여전히 깨닫지 못한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날은 바람 한 줄기만 불어도 태어나길 잘했다 싶고, 어떤 날은 묵은 괴로움 때문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싶습니다. 그러나 인간만이 그런 고민을 하겠지요. 철쭉은 그런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을 겁니다. 오로지 빛에만 집중하는 상태에 있지 않을까.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철쭉의 마음을 짐작해봅니다. 바깥의 빛이 있고 안의 빛이 있을 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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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워하면서 일하는 사람은 드물다. 질리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하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어떤 일에 뛰어난 것 같은데 얼마 동안 해보니 질린다면, 그 일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당장 뛰어난 것 같지는 않지만 하고 하고 또 해도 질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도해볼 만하다.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