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시점에 가득 진열되어 있는 펜들 중에
마음에 드는 색깔 몇 가지를 골라내는 것 같은 기분으로
무라카미-왠지 하루키보다는 '무라카미'의 어감이 좋은-의
'한없이 슬프고 외로운 영혼에게' 중에서
동그라미쳐 둔 몇 가지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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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친구가 보낸 한 통의 편지, 결혼 청첩장이 나를 오래된 거리로 되돌아가게 한다. 나는 이틀 간의 휴가를 얻어서 호텔방을 예약한다. 나는 거기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무엇인가 이상한 기분이다. 몸의 절반이 투명하게 변한 것 같은 느낌이다. 마치 내가 내 몸에서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12년 전에 나는 <거리>에 애인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이 방학을 하면 나는 슈트케이스에 짐을 넣고 신간센의 새벽 첫차를 탔다. 창가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고 풍경 같지도 않은 풍경을 바라보면서 햄 샌드위치를 먹고 맥주를 마셨다. 그런 아침 시각에 맥주를 마시는 것은 나에게는 하나의 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거리>에 도착하는 것은 언제나 정오 전이다. 태양은 아직 중천에 뜨지 않았고 <거리> 구석 구석에는 아직 아침의 술렁거림이 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나는 슈트케이스를 끌어안은 채로 커피숍에 들어가 모닝 서비스의 커피를 마시고, 그런 다음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 시각에 만나게 되는 <거리>의 모습이 나는 좋았다. 따사로운 아침 햇살, 향기로운 커피, 사람들의 졸린 눈, 아직 손상되지 않은 하루, 내 손가락이 다이얼을 돌리는 소리. 지금 시간은 3시 20분. 시간은 마치 낡은 뉴스 영화의 릴처럼 달그락거리며 돌아간다. 나는 눈을 감는다. 그렇지만 내 머리 속에는 아직 시간이 소리를 내면서 돌아가고 있다. 마침내 그것은 신간센의 나른한 진동과 하나로 섞여간다. 그 <거리>에 돌아가도 나에게는 이제 만나야 할 상대도 없는 것이다. 전화를 할 상대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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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교라고 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변변하게 공부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반항심이 많은 학생이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선생님에게 얻어맞은 일 밖에 기억나지 않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마작을 하거나 여자 친구랑 놀러 돌아다니는 사이에 3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대학에 들어갔더니 학원 분쟁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 일이 일단락지어질 무렵에는 학생 신분인 주제에 결혼을 했으니, 그 다음에는 생활에 쫓기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무리 과거를 되새겨 보아도 지긋하게 엉덩이를 눌러 붙이고 앉아서 학업에 힘쓴 기억이 별로 없다. 특히 와세다 대학 문학부에는 7년 동안이나 적을 두고 있었으면서도 무엇 하나 배운 것이 없다. 이건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는 말이다. 와세다 대학에서 얻은 거라곤 지금의 아내뿐인데, 아내감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게 교육기관으로서의 와세다 대학의 우수성을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내가 모든 것으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소위 '사회인'이 되고 난 다음이다. 어쩌면 그것은 학생 시절에 마음껏 놀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학교라고 하는 제도가 애당초 내 성격에 안 맞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혹은 내가 자발적으로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는데 가치를 두는 타입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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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의 법칙은 아주 간단하다. 수많은 공을 들여서 쌓아올리는 일에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파괴하는 일에 걸리는 시간은 고작해야 빛이 반짝하는 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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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류의 이론과 분석은 이른바 짧은 바늘 끝으로 수박을 쪼개려고 하는 행동과 같다. 그들은 껍질에 흠집을 낼 수는 있지만 영원히 달콤한 과육까지 도달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껍질과 과육을 명확히 분리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세상에는 껍질만 핥고서 기뻐하는 괴상한 무리들도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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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 젊었을 때에는 내가 나 아닌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자면 카사블랑카에 바를 열고 잉그리드 버그만과 친구가 되는 일도 가능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좀 더 현실적으로 나의 자아에 어울리는 더 유익한 삶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나를 바꾸기 위한 훈련까지도 했다. 「녹색혁명」도 읽었고 심지어 「이지 라이더」와 같은 영화는 세 번씩이나 보았다. 그러나 나는 매번 마치 방향키가 부러진 보트처럼 똑같은 자리로 되돌아왔다. 그것은 또 다시 '나'였다. 나는 그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면서 내가 되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절망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 절망인지도 모른다. 투르게네프라면 환멸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고 도스토예프스키라면 지옥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서머셋 모옴이라면 현실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가 그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간에 그것을 결국 나 자신이다.
아무튼, 오랜만에 하루키의 달콤한 문장들을 읽었더니 기분이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