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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다. 이 말을 소리 내어 중얼거리기 시작한 게 그즈음이었을 것이다.
결론에 사로잡혀 있으면 정말 중요한 것들이 사소해진다. 결론에 매달려 있으면 속과 결이 복잡한 현실을 억지로 단순하게 조작해서 자기 결론에 끼워 맞추게 된다. 세상은 원래 이러저러하다는 거창한 결론에 심취하면 전혀 그와 관계없는 상황들을 마음대로 조각내어 이러저러한 결론에 오려 붙인 뒤, 보아라 세상은 이렇게 이러저러하다는 선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정작 소중한 것들을 하찮게 보게 만든다. 이와 같은 생각은 삶을 망친다.
거창한 결론이 삶을 망친다면 사소한 결심들은 동기가 된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결심들을 잘 지켜내어 성과가 쌓이면 삶을 꾸려나가는 중요한 아이디어가 될 수도 있다. 사실 결론에 집착하는 건 가장 피폐하고 곤궁하고 끔찍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가장 훌륭한 안식처다. 나도 거기 있었기 때문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죽음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는 다른 사소한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다른 사소한 것들을 신경 쓰지 않고 있는 동안, 나는 죽음 이외에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제발 거기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이 글을 그래서 쓰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다. 내가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는 모른다. 백 살 넘게 살지도 모르고, 재발한다면 내년에 다시 병동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때보다 건강하고 의욕이 넘친다. 그리고 많은 결심들을 한다. 나는 제때에 제대로 고맙다고 말하며 살겠다고 결심했다. 여러분도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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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덜떨어져도 인사 잘하고 성실하면 중간은 간다. 정작 어릴 때 들었을 때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가 삶을 통해 신뢰하게 된 명제다. 대개 인사성과 성실함은 관료적이고 수직적인 사회에서나 빛을 발하는 덕목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건 가장 끔찍한 오해들 가운데 하나다. 가진 것이 없을 때 저 두 가지는 가장 믿을 만한 칼과 방패가 된다. 타인을 가늠하는 데도, 나를 무장하는 데도 좋은 요령이다.
살면서 성실하게 노력한 만큼 공정하게 돌려받은 경험이라고는 몸을 쓰는 일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노력한 것보다 결과가 훨씬 더 좋거나 나빴다. 이와 같은 경험을 축적해서 쌓아나가는 일은 중요하다. 이기는 경험을 쌓으면 패배해도 주저앉아 비관하지 않고 다시 한번, 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형편이 좋은 집에서 태어난 청년들은 이기는 경험을 쌓는 일이 비교적 수월하다. 스스로 형편이 불리하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무엇보다 몸을 이기는 경험을 쌓아나가자. 출발선이 다르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몸을 이기는 경험을 대신 쌓는 것이다. 이기는 경험을 쌓는다는 건 언제 힘을 주고 뺐는지, 언제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는지 근육의 쓰임과 호흡의 감각을 기억해내는 것과 같다. 지는 것에만 익숙해지면 뭐가 진짜 이기는 거고 지는 건지조차 구분이 어려워진다. 되는 놈만 늘 되는 이유가 그런 것이다. 이겨본 사람만이 다시 이길 수 있고, 지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요컨대 끝까지 버틸 수 있는 몸을 만들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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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제와 진통제를 먹고 침대에 누우면 그때부터 시작이다. 내 삶에 고통을 안긴 사람들의 얼굴이 천장에 투사된다. 나를 배신하고, 기만하고, 속였던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이 내게 암을 심었다고 확신했다. 이자들이 천장에 맺혀 나를 내려다본다. 축축하고 무거워진 천장이 천천히 나를 향해 내려온다. 내려올 때마다 그들을 향한 원망과 증오도 한층 더해진다. 수백 번 자세를 바꾸어 외면해보려 해도 소용이 없다. 마침내 천장이 코앞까지 전진해오고 질식하기 직전이 되어 나는 겨우 잠이 든다. 그리고 두 시간 후에 아파서 깨어난다. 다시 천장에 깔려 질식하기를 영원처럼 반복한다. 아침 해가 밝았을 때 나는 거의 죽어 있다.
매일 밤 침대에 누워 잠이 들기 전 그런 생각을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 내가 보았던 천장과 바닥을 감당하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 어둡고 축축한 구석을 오랫동안 응시하며 정확히 뭐라고 호소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피해의식과 절망과 비탄으로 현실을 왜곡하고 애꿎은 주변을 파괴하며 오직 비관과 자조만을 동행 삼아 이 모든 건 결코 바뀌지 않을 거라 믿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기도 할 거라고 말이다. 여러분의 고통에 관해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건 기만이다. 고통이란 계량화되지 않고 비교할 수 없으며 천 명에게 천 가지의 천장과 바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기로 결정하라고 말하고 싶다. 죽지 못해 관성과 비탄으로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기로 결정하라고 말이다.
만약 당신이 살기로 결정한다면, 천장과 바닥 사이의 삶을 감당하고 살아내기로 결정한다면, 더 이상 천장에 맺힌 피해의식과 바닥에 깔린 현실이 전과 같은 무게로 당신을 짓누르거나 얼굴을 짓이기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적어도 전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그 밤은 여지껏 많은 사람들을 삼켜왔다. 그러나 살기로 결정한 사람을 그 밤은 결코 집어삼킬 수 없다. 이건 나와 여러분 사이의 약속이다. 그러니까,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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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능력으로 특정할 수 있는 몇 가지 원인을 고치거나 없앤다고 해서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 운명 이야기가 아니다. 충분한 원인과 조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에 결국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는 이야기다. 피할 수 없다.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결과를 감당하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있는 힘껏 노력할 뿐이다.
오늘 밤도 똑같이 엄숙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천장에 맞서 분투할 청년들에게 말하고 싶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벌어질 일이 벌어진 거다. 그러니까 괜찮다. 찾을 수 없는 원인을 찾아가며 무언가를 탓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에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음 일을 하자. 그러면 다음에 불행과 마주했을 때 조금은 더 수월하게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음 일을 할 수 있다. 내일은 차를 수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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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나 시간을 돌리는 방법에 대해 알지 못한다. 특히 시간을 돌리는 방법에 관해선 알더라도 돌리고 싶지 않다. 이미 벌어진 일은 벌어진 대로 잘 껴안고 살아갈 생각을 해야지 그것을 인력으로 애써 돌이킨다고 해서 처음처럼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삶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액정보호필름을 붙이는 것과 같다. 붙이기 어렵다. 먼지가 들어가고 지문이 남는다. 그래서 지금 당장 확 떼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거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정말 망치게 된다. 미련을 버리지 못해 먼지를 빼고 지문을 지우려다 아예 구겨지고 망가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운이 좋은 아이들은 액정보호필름을 새 걸로 다시 사주는 부모가 있다. 그런 부모가 없다고 화를 내거나 아파하지 말아라. 시간 낭비다. 그냥 먼지와 지문을 참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빨리 배우면 된다. 부모가 사준 두 번째 기회를 누리는 아이들은 그런 방법을 배울 굴곡이 없다. 언젠가 알게 되겠지만, 나와 내 주변의 결점을 이해하고 인내하는 태도는 반드시 삶에서 빛을 발한다. 그걸 할 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삶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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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죽은 당신에게 일곱 가지 장면으로 삶을 요약해보라는 과제가 주어졌다고 해보자. 일종의 포트폴리오다. 유튜브 섬네일 이미지라고 생각해도 좋다. 대표 이미지를 일곱 개 고르는 거다.
내 인생은 그저 하찮고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서 일곱 개씩이나 되는 장면을 고를 수가 없다며 낙담하는 사람도 있고, 내 인생은 너무 화려하고 중요해서 고작 일곱 개의 장면으로는 요약하는 게 불가능하다며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낙담하는 자도 화를 내는 자도 결국에는 똑같이 겸허한 마음으로 과제를 마치리라 생각한다. 적막한 삶도 소란스러운 삶도 마지막 일곱 번째 장면은 똑같이 죽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혼자 죽는다.
막상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는 작업이다. 눈을 감고 여태까지의 삶을 펼쳐본다. 내 삶의 가장 충만한 순간이 떠오른다. 또한 가장 비참한 순간이 떠오른다. 가장 평화로웠던 순간이 떠오르고, 가장 시끌벅적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가장 고마웠던 순간이 떠오르고, 마지막으로 가장 억울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수많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고 내가 들은 가장 기쁜 말들과 가장 아픈 말들이 뒤를 따른다. 마지막까지 남아 잘 지워지지 않는 얼굴과 이름들이 있다. 미련이 남지 않게 잘 눌러서 마저 지우고 고개를 들면, 그렇게 일곱 가지 장면을 모두 정한다.
나는 여태 내 삶이 농담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딱히 성공적이지 못한 농담 말이다. 백 명의 관객 가운데 두 명밖에 웃기지 못한 실패한 농담. 그게 내가 생각하는 내 삶이었다. 그런데 일곱 가지 장면을 꼽고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꽤 입체적이다. 이야기 속 인물이라고 생각했을 때 적어도 애정을 가지게 되는 종류의 캐릭터 말이다. 일곱 가지 장면을 꼽는 일은 내 삶을 이야기로, 나를 캐릭터로 만든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지나가던 행인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과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사실 이 과제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어디까지나 혼자만의 작업이어야 한다.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선별한 일곱 가지 장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과제를 나누어 준 다른 두 사람에게도 나와 같은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망했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으면 한다. 시간을 돌려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부디 평안하기를. 우리의 삶은 남들만큼 비범하고, 남들의 삶은 우리만큼 초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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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을 쌓아 올려 자식에게 고스란히 전수해내는, 혹은 재물 그 자체를 위한 인프라로써 기능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이는 지리멸렬한 평생의 과정이 가족의 본령이 아니다. 내부의 갈등을 가족이라는 허명으로 덮어 일방적으로 무마하려 하지 않고 해체되었더라도 위기가 닥쳤을 때는 아무런 조건 없이 언제든 다시 찾아와 옆을 지켜주는 게 가족이다. 그게 반평생을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서 삶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 마땅한 의리다. 의리 말이다. 아, 한국 사회에서 의리라는 단어는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저평가되어 있는가.
가족이 혈연 공동체라는 이야기를 흔히 한다. 나는 가족이 혈연 이전에 사연으로 유지되는 운명 공동체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작 나는 해체된 상태로 그냥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가족의 일원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연하게 하루를 섞은 이 가족이 부럽고 기뻤다. 귀하게 느껴졌다. 8층 버튼 앞에서 머뭇거렸던 손가락의 감각은 잊혔다. 그런 경험들이 있다.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사람을 충만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나이가 들수록 크고 격정적이며 값비싼 것보다 이와 같은 경험들이 쌓였을 때 방향감각이 생기고 등이 곧게 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청년이었을 때 알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어머니는 발병한 이후 처음으로 수치가 호전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나아질 일만 남았다. 최은희 어머니의 완쾌를 바라고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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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감에 대해 생각하면 나는 늘 전자기력을 떠올린다. 세상에는 인력과 강력, 약력 그리고 전자기력 이렇게 네 가지 힘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내 손이 키보드를 그냥 통과하지 않고 누를 수 있는 건 전자기력 때문이다. 전자기력은 ‘나’를 ‘나’라는 형태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든다. 이를테면 고슴도치의 가시 길이나 〈에반게리온〉의 ‘AT 필드’처럼 내가 나라는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거리인 것이다. 너무 외롭다고 해서 아예 걷어버리면 나라는 형태가 허물어진다. 반대로 타인이 너무 두려워 보호막으로 두텁게 에워싸면 속절없이 너무 멀어져버린다. 요컨대 타인과의 거리라는 것은 바로 나의 보호막과 너의 보호막의 두께를 어림잡아 더하는 일이다.
삶에 있어 큰 사고라고 할 만한 최근의 일을 통과하면서, 나는 나의 가시와 보호막이 터무니없이 길고 두터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길이와 두께는 혼자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강박으로 오랫동안 비대해져왔다. 그래서는 애초 타인과의 정확한 거리를 셈하는 게 무의미하다. 어떻게 해도 서로의 말이 닿기에는 너무 멀기 때문이다. 나의 셈은 틀렸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결혼해야겠다는 말을 듣고 실망한 친구들의 셈도, 나는 조금씩 어긋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관계가 어려운 것은 나와 너의 거리감이라는 게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이 친구들은 단지 ‘때가 되어서’ 결혼을 한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다. 이유와 확신을 가지고 결혼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처음 만났을 때 완벽해 보였던 셈이 이제 와서는 틀어져버린 것이다. 사람 사이의 거리감을 매번 셈하는 건 고된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익숙하고 편한 관계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나면, 고된 셈 따위에는 흥미를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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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시마 유키오의 태도가 결국 자기혐오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 두 소설가는 나약하다는 점에서 서로 닮은꼴이었다. 우리 모두가 나약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 나약한 부분을 동반자처럼 짊어지고 그것과 친구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끝내 인정하지 않고 고약한 위악을 내뿜는 사람도 있다.
미시마 유키오는 병역을 부정하게 면제받았던 일과 성적 정체성, 그리고 나약한 신체에 대해 매우 창피하게 생각했다. 피트니스 운동과 우익 활동에 병적으로 집착했던 맥락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그가 운동으로 다져진 몸으로 일본도를 들고 우익 머리띠를 두른 채 찍은 화보를 보고 있으면, 그래서 조금 슬퍼진다. 그는 자신이 했던 말 그대로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연기”하고 있다. 거의 벌거벗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거기에 실제 그 자신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찌 됐든 우리 모두는 어떤 면에서 다자이이기도, 또한 미시마이기도 하다. 우리는 본래의 타고난 부분에 순응해 살아가고, 가끔씩은 그것을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켜 놀라운 성취를 거두기도 한다. 한편 정말 마주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본성이나 실수 앞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현실을 뒤틀어 재구성해버리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왜곡과 거짓, 고통과 외면의 기억 또한 잘 정돈된 예술의 토대 위에 쌓아 올리는 데 성공한다.
오늘도 나는 나와 다투고, 또다시 친구가 되기를 반복한다. 지치는 노릇이지만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될 일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면 거리 위를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슬퍼 보인다. 예민함은 더 많은 것에 공감할 수 있게 만들어주지만 꼭 그만큼 공연한 슬픔을 안겨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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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삶이 애틋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누구나 자신이 오해받는다고 생각한다. 사실이다. 누군가에 관한 평가는 정확한 기준과 기록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평가하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결정된다. 맞다. 정말 불공평하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이와 같은 현실을 두고 누군가는 자신을 향한 평가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킨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죽을힘을 다해 그걸 해낸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한다. 반면 누군가는 끝내 평가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자신과 주변을 파괴한다.
대부분의 성공에는 운이 따른다. 반면 실패는 악운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실패는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직면한 실패가 자연스런 결과로서의 실패인지, 혹은 의도에 의한 음모와 배신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다. 중요한 건 다음이다. 나라는 인간의 형태는 눈앞의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을 선택하는 순간 결정되는 것이다.
피해의식이 느껴지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마다 나는 닉슨을 떠올린다. 닉슨의 노력과 선량함을 떠올린다. 그런 훌륭한 가능성을 가졌던 사람을 완전히 망쳐버린 피해의식에 대해 마지막으로 떠올린다. 그리고 경계한다. 피해의식은 사람의 영혼을 그 기초부터 파괴한다. 악마는 당신을 망치기 위해 피해의식을 발명했다. 결코 잊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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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버티고 싸우되 피폐하고 곤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끼리 선의를 가지고 선한 행동을 하며 서로를 도울 것. 〈쓰리 빌보드〉는 자력구제를 위해 일어선 사람들 사이의 선한 의도와 행동 그리고 연대만이 〈디어 헌터〉나 〈쳐다보지 마라〉와 같은 비관적 결말을 극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멋지고 빼어난 것들 덕분이 아니라 언제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오래된 선행들 때문에 구원받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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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질문을 해왔다. 지금이 밑바닥이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나는 대답했다. 더 이상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때가 밑바닥인 것 같습니다. 거기 이르고 나면 여기서 더 망해봤자 크게 달라질 것도 없으니 생존을 위해 어떤 노력이라도 할 수 있는 몸 상태가 됩니다. 배고픈 건 주워 먹으면 되고, 기분 나쁜 건 내가 못났으니까 하고 넘기면 됩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하니까 뭐든 할 수 있고 또 뭐든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그렇게 삶이 알려준 값비싼 교훈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바닥을 찍고 고비를 지나 안정을 되찾게 되면 우리는 매번 처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머리로 알더라도 행동이 따라주지 않는다. 입으로는 말할 수 있어도 정작 나 자신에게 적용하기 점점 어려워진다. 바닥에서 깨달았던 것들은 삶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자산이다. 그럼에도 그게 언제 그랬냐는 듯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거나 잘 기억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들을 까먹는 것이다. 그렇게 삶은 계속되고 우리는 실수를 반복한다.
- 허지웅, <살고 싶다는 농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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