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면밀한 계획하에 진행되었다. 그것이 고도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가장 거액의 자본을 투자하는 자가 가장 유효한 정보를 입수하며, 가장 유효한 이익을 얻게끔 된다. 누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자본 투자라는 것은 그러한 것을 내포한 행위인 것이다. 자본 투자를 하는 자는 그 투자액에 상응한 유효성을 요구하게 된다. 중고차를 사는 사람이 타이어를 발로 걷어차고 엔진을 살펴보고 하듯이, 1천억의 자본을 투자하는 자는 그 투하의 유효성을 세세히 검토하는 것이며, 어떤 경우에는 조작도 하는 것이다. 그 세계에선 공정성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그런 것을 일일이 따지기에는 투자 자본의 액수가 너무 큰 것이다.
강압적인 일도 한다. 가령, 토지 매수에 응하지 않는 자가 있다고 하자. 예전부터 장사를 하고 있던 신발 가게가 매수에 응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디서인지 해결사 같은 자들이 나선다. 거대 기업이라는 건 제법 그런 루트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회사는 정치가로부터, 소설가, 록 싱어, 폭력배에 이르기까지, 입김이 들어간 자들을 일단 전부 거느리고 있다. 경찰도 그러한 사건에는 그렇게 열심히 손을 쓰려 하지 않는다. 경찰의 제1위까지 이야기는 이미 통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부패랄 것도 아니다. 시스템인 것이다. 그것이 자본 투자란 것이다. 물론 예전부터 많건 적건 그런 일은 있었다. 예전과 다른 점은, 그 자본의 그물이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치밀해지고 강해졌다는 사실이다. 거대 컴퓨터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하여 세계에 존재하는 온갖 사물과 사상이 그 그물 속에 고스란히 수용되어 있다. 집약과 세분화에 의해 자본이라는 것은 일종의 개념으로까지 승화되어 있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종교적 행위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자본이 갖는 다이내미즘을 숭상했다. 그 신화성(神話性)을 숭상한다. 도쿄의 땅값을 숭상했으며, 번쩍거리는 포르쉐가 상징하는 것을 숭상했다. 그것 이외에는 이 세계에는 이미 신화 따위가 남겨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고도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었다. 마음에 들건 안 들건간에, 우리들은 그러한 사회에 살고 있었다. 선악이라는 기준도 세분화되었다. 궤변론적인 것이다. 선 가운데에도 유행을 좇는 선과 유행을 좇지 않는 선이 있었다. 악 가운데에도 유행을 좇는 악과 유행을 좇지 않는 악이 있었다. 유행을 좇는 선 가운데에도 정연한 것과, 헐렁한 것이 있고, 최신 유행에 정통한 것과, 속물 근성인 것이 있었다. 짝짓기도 즐길 수 있었다. 미소니의 스웨터에 투르살리의 팬티를 걸치고, 폴리니의 구두를 신는 것처럼 복잡한 스타일을 즐길 수가 있었다. 그러한 세계에서 철학은 자꾸 경영이론을 닮아갔다. 철학은 시대의 다이내미즘에 근접하는 것이다.
1969년과, 그리고 40년이 지난 2010년에서의 고도자본주의.
무라카미하루키 댄스댄스댄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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