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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보수와 낡은 진보의 적대적 공존을 깨라"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김성식 "한나라당, 임계점에 도달했다"
프레시안, 2012-01-18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
1. '낡은 보수와 낡은 진보의 적대적 공존 상태'야말로 정치가 국민의 삶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결국 국민으로부터 외면받는 핵심 이유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이 둘 간의 적대적 공존 상태란 무엇인가? 그리고 낡은 보수와 낡은 진보는 어떤 면에선 샴쌍둥이처럼 매우 닮은 부분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정치를 하면서 이에 대해 특별히 느낀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우기고 가르치려 하고 위선적인 모습을 가졌다는 점에 낡은 보수와 낡은 진보는 똑같다. 낡은 보수는 낡은 진보가 있어주면 자기 개혁을 하지 않고도 집권할 수 있어 좋은 것이고, 낡은 진보도 낡은 보수가 개혁을 안 해주면 신나게 삿대질하면서 다음에 정권을 획득하면 되니까 좋은 것이다. 따라서 변화에 대한 근본적인 걸림돌이 이 적대적인 공존구도이다.
집권세력이 되었을 때 국정운영방식과 여당의 행태를 과거 틀에서 벗어나게 해야 하는데 지난 노무현 정부 때도 이명박 정부 시기에도 이런 적대적 공존구도를 바꾸지 못했다. 이 핵심적 문제의 기저에는 지역주의에 기반을 둔 독점적 공천 구조가 깔려 있다. 영호남, 충청 지역 같은 경우에는 특정 정당의 공천만 받으면 선거에서 이기는 구조가 여전히 존재한다. 또 통치 구조가 대통령 5년 단임제라는 것도 이유가 된다. 당선이 되는 순간 국민과 다른 정당과의 대화를 통해 책임정치를 하기보다는 '역사의 평가'를 내세우며 우격다짐의 정치를 하는 구조적인 문제도 있는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지난 노무현 정부는 많은 국민들에게 처음엔 의로운 정부로는 비춰졌다. 그랬던 노무현 정부도 보궐선거가 있을 때마다 '28대 0'이라는 계속되는 심판을 받았고 마지막에는 노 대통령이 민심을 얻지 못해 지지도가 땅에 떨어지고 대선에서는 엄청난 표차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정치가 의로움에 더해서 정치적인 문제 해결능력을 갖춰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를 이분법으로 매도하고 분열시키지 않기를 국민은 바랬다. 지난 정부는 양극화 문제에 대해서 가장 많이 이야기했지만, 그것을 실질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다. 개혁의 의지는 좋으나 그것이 이분법적 편 가르기가 되어 당시 여권 내부에도 엄청난 갈등과 분열이 있었다. 이후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정신을 차려 이전 정부보다 더욱 국민통합과 양극화 해소를 위해 노력했어야 했는데 역시 문제의식도 빈곤했고 문제해결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밀어붙이기나 하고 더욱 권위적 모습을 보였다. 노무현 정부가 국민에게 주었던 의로움조차 보여주지 못하고 끼리끼리 인사, 부패 등의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국민들의 응징의 심리가 만연하게 된 것이다.
구조적인 문제를 포함한 선거제도, 통치제도, 개헌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정치가 가진 많은 문제점들을 모두 고쳐 나가야 한다. 그런데 그전에 정치 행태부터 개혁해야 한다. 정치 행태의 개혁은 국회의원 개개인의 치열한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 공천에서 잘릴 각오를 하면 되는 것이다. 정치인 스스로가 권력의 눈치를 보고 해바라기처럼 따라다니는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한다. 청와대에서 호루라기를 불면 따라가는 정치, 몸싸움의 도구가 되는 정치 수준에서 넘어서야 한다. 문제 해결능력과 국민적 공감 능력을 키워 이것을 대의민주주의 과정속에서 녹여내고자 하는 여야 정치인들의 노력이 절실하다.
2. 한국 정치에서 여야대립은 고질적인 문제인데, 우리 정치의 문제해결능력을 어떻게 해야 키울 수 있다고 보나?
세 가지 문제를 예로 들자. 남북문제, 정규직 비정규직 문제, 마지막으로 복지 부담을 늘리는 문제와 복지를 확대하는 문제. 이 세 가지 문제는 어느 한 정당이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다.
먼저 남북문제를 보자. 정부가 햇볕정책을 할 때도 북한은 핵과 미사일은 개발했고, 두 차례의 서해교전(제2연평해전)을 통해 젊은이들이 죽었다. 현 정부의 고립정책에서도 천안함 폭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이 있었다. 즉 남한 내부가 갈려져 있을 때는 어떤 정책도 북한변화나 한반도의 안정에 기여하지 못하고 북한이 남한을 갖고 놀 수 있는 수단이 되는 거다. '전쟁이냐, 평화냐'는 야당식 구분과 '퍼주기'라는 낡은 보수의 논리가 모두 선동적인 것이다.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만 커지고 있다. 여야가 적어도 남북문제에 관한 한 합의된 로드맵과 정치적 방향을 만들어야 북한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국민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북한 동포들에게 필요한 정책을 펼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양극화 문제 중의 핵심은 대기업과 중소기업과의 관계 문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이다. 그런데 진보 진영에서는 대기업 강성 노조의 기득권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는 양보와 타협과 이해의 조화를 전제로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노동의 유연화만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정책도 문제이지만, 표만 의식하여 비정규직 철폐와 보호만을 이야기하면서 정규직의 양보에 대해 말하지 않는 무책임한 자세로는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차별시정은 당장 시작해야 한다. 기업주는 노동유연성과 차별적인 저임금을 동시에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사회보험과 고용보험의 사각지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고, 실업 후에는 고용보험 정도는 탈 수 있도록 하고, 노후에 국민연금 정도는 탈 수 있고 건강보험이 끊기지 않도록 하는 정도부터 문제해결의 출발점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000만 명의 고용보험 사각지대와 650만 명의 국민연금 사각지대의 사람들을 놔둔 상태로 무상시리즈를 이야기하는 것이나, 국민들의 살림이 어려워 불안에 빠져 있는데 골고루 돌볼 생각은 하지 않고 시장경제 논리만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러한 모든 문제 또한 사회적 합의와 양보를 통해서 밖에 해결할 수 없는데 이것을 어느 한 정당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정치적 합의를 추구하는 연립정부식 운영을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복지 문제도 마찬가지다. 복지를 늘리는 문제에는 부담이 느는 문제와 우선순위 문제가 있다. 여기에 정치적 합의 도출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선 국민이 힘들어 죽겠는데 4대강 예산에 돈을 쏟아 붓는 현 정부에 대해 열 받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보편적으로 할 것은 보편적으로 하고 맞춤형으로 할 것은 맞춤형으로 하면 될 것을 가지고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는 논쟁을 몰아가는 야당도 우스꽝스럽다. 자신들이 집권했을 때는 왜 안 했나. 이 정부와 낡은 진보가 서로 얽매여서 삿대질하는 사이에 민생은 팍팍해지고 복지 사각지대는 더 커지면서 국민들은 기성 정치권에 대해 불신하게 된 것이다.
한나라당이 야당일 때 반값 등록금 이야기를 했고, 기초노령연금도 모든 노인 100%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때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당은 국립대학교 등록금이 사립대학교에 비해서 너무 낮기 때문에 국립대학교 등록금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급식은 지방정부 사업으로 하자면서 일부 예산을 주며 책임을 전가했다. 그런데 여야가 입장이 바뀌고 나면, 반대되는 이야기를 한다. 이런 무책임한 정치 때문에 우리나라의 복지정책이 체계적 발전하지 못했다. 따라서 여러 정당이 함께 어울려서 정치적 컨센서스(의견일치)를 이뤄내고 그것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는 정치를 해야 한다.
따라서 이제 정치는 아집과 독선을 넘어서서 타협의 능력과 문제 해결의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조화로운 타협의 정치가 아니면 이제 정치는 망한다. 정치가 망하면 그 결과는 기존의 기득권을 가진 정치 세력이 망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공동체의 피해, 국민의 피해로 귀결되는 거다. 앞으로 대통령 될 사람은 정치적 합의 도출을 중시해야 하고, 그러한 국정 시스템을 체계화해야 한다. 당론을 앞세우는 정당권력은 줄어들어야 하고, 국회의 자율적인 토론의 영역이 더욱 커져야 한다.
3. 최근 한 언론에서 "복지 논쟁과 관련하여 성장과 복지, 분배문제를 대립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는데, 바람직한 복지국가의 모델, 패러다임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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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 성장기에는 일자리와 장사의 기회가 확대되었기 때문에 복지 시스템을 강화하는 과제는 뒷전에 밀려나 있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적게 내고 적게 복지를 하는 저부담ㆍ저복지 국가가 되었다. 그런데 IMF 외환위기 이후 '고용 없는 성장'이 지속되었고 비정규직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복지 수요 또한 크게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이번에 글로벌 금융위기도 겪으면서 서민의 경제가 더욱 어려워졌다. 문제는 한 번에 고부담ㆍ고복지 국가로 가기는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복지제도라는 것은 지층과도 같아서 과거 복지제도의 정책적 결과물의 축적 위에 복지가 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 진보할 것 없이 재정 건전성을 지키면서도 어떻게 하면 중부담ㆍ중복지 국가로 갈 수 있는지에 대한 솔직한 로드맵을 내놓아야 한다.
. 우리 사회는 국민들의 불안이 커져 있고, 일자리가 막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질도 나빠져 있는 상태이다. 과거와는 달리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가 아니라, 재산 격차가 교육 격차로 이어져서 미래 격차로 이어져 있다. 또한, 하도급 구조 속에서 대기업의 거대한 수익이 밑으로 내려오고 있지 않다. 이런 시기에는 경쟁력 강화와 복지 강화를 균형 잡힌 선순환 구조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때로는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구조조정 자체를 막겠다는 논리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을 낭떠러지로 내모는 구조조정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핀란드의 대표적인 휴대폰 기업 노키아가 스마트폰에 뒤짐에 따라 망하기 일보 직전의 기업이 되었다. 작년에 노키아는 4300명의 핵심 인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 1700명을 해고했다. 그런데 해고된 1700명이 사무실을 점거하고 농성했다는 얘기도, 낭떠러지로 떨어졌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예전에 자신이 받던 봉급의 80% 이상을 실업수당으로 받고, 수당을 받을 수 있는 기한도 길고, 본인이 원하는 재취업 훈련도 받을 수 있어 다른 기업에 취업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노키아의 사례는 우리 사회가 경제 활력을 높이기 위해서도 복지를 확대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진보 또한 경제 활력을 키우기 위한 여러 노력과 병행하면서 복지를 말해야 한다. 사람들은 일 속에서 자아실현을 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한다. 즉 기업이 투명성과 사회적 책임성을 높이도록 하되, 일자리를 늘릴 수 있도록 투자 여건을 잘 마련해주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자꾸 계급적 시각 혹은 신자유주의적 시각에 의해서 편협하게 재단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국민이 현재 던지고 있는 정치권의 무능에 대한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수와 진보는 자기성찰과 혁신 속에서 더 풍요로워지고 현대화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낡은 보수가 더 큰 문제이다. 민본21 정도의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 보수의 주류가 되어야 한다.
4. "신자유주의도 사회주의도 이미 길이 아님이 검증되었습니다. 우리의 정치현실에서 극심한 이념 대립과 지역 대립과 세대 대립을 극복하려는 '정의로운 자유민주주의자'가 설 땅은 넓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부딪히며 도전할 가치가 있습니다. 관건은 성찰과 공감의 능력입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최근 들어 자유주의 논쟁이 심화되고 있는데,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정의로운 자유민주주의'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신자유주의나 사회주의는 이미 미래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냐, 사회민주주의냐' 하는 것은 의미 있는데 우선 나는 이 둘은 공존 가능한 것이고 경쟁해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극우적인 전체주의나, 극좌적인 전체주의는 용납할 수 없다.
나는 자유민주주의를 기초로 해서 정치를 하고 싶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에서 사회민주주의를 하기에는 인문학적 사회ㆍ문화적 정치적 내공이 너무 취약하기 때문이다. 유럽 사민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타협이라든가, 배려라든가, 법치라든가 하는 사회적 자본들이 미흡하다. 또한, 자원이 많지도 않는 상황 속에 창의적인 경제 활력이 여전히 중요하다.
나는 자유민주주의를 정의롭게 가꿔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권력의 정의, 시장의 공정 등을 확립하는 것이 핵심 과제이다. 합리적인 사회민주주의자와 대화할 수 있고 그쪽에서 제기되는 아젠다를 적극적으로 흡수하는 정의로운 자유민주주의자의 길을 가는 것이 나의 원칙이다.
낡은 보수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점은 공정하지 않는 경쟁을 시장경제라고 우기는 것이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쥐어짜면서 이것을 시장경제라고 우기는 것, 인력과 기술을 탈취해가고 창의에 대해서는 보상도 해주지 않는 것, 정부로부터 10억 원짜리 조달을 받으면 5억 원은 챙겨놓고 5억 원으로 하청구조를 돌리면서 이것을 시장경제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또한, 부모의 재산 격차가 엄연히 교육 격차와 미래 격차로 이어지는데 그저 대학 입시 원서를 낼 수 있는 자유를 기회의 평등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낡은 보수이다.
낡은 진보는 결과의 평등에 집착을 해서 인간의 자유와 창의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바탕으로 하는 자기실현과 이익의 추구가 사회발전의 동력일 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즉 모든 것을 결과의 평등으로 해석하려 하고 서로 다름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진보가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면 그 주장만 진리라고 주장하고 나머지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선동정치는 쉽다. 그러나 문제 해결의 정치는 어렵다. 좁은 길이지만, 나는 정의로운 자유민주주의를 가꾸어갈 것이다.
[2]
진보, 뉴라이트에게서 '자유주의'를 탈환하라
[박동천의 집중탐구⑥]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프레시안, 2009-02-28
제1절 자유와 평등은 상호모순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현대정치사에 굴곡이 많았던 탓에 용어의 의미까지 굴절된 경우로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역시 빠질 수 없다. 이 연재에서 자유주의나 사회주의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인데, 현실 정치에서 엄청난 혼동과 왜곡의 주제가 되고 있는 단어들을 사용하면서 그저 독자들에게 알아서 들으라고 내버려둘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상당수의 독자들에게는 이미 기초적이고 당연한 사항이 될 수 있겠지만, 차후에 펼칠 논의에서 불필요한 오해의 여지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생각하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미리 제시할 필요가 있다.
우선 대단히 통속적인 대조에서부터 시작해보자. 흔히 자유주의는 자유를 중시하고 사회주의는 평등을 중시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이분법은 객관식 시험문제를 내기 편하게 만드는 용도 말고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도움이 될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평등한 자유가 아니라면 자유일 수가 없고, 자유롭지 않은 상태라면 평등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유주의가 평등을 배척하고 자유만을 원한다든지, 사회주의가 자유를 배척하고 평등만을 원한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애당초 자유라는 개념 자체가 가치를 가지려면 평등한 자유가 아니면 안 된다. 단적으로 "법 앞에 평등"이란 자유주의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념 중 하나다. 따라서 자유와 평등 사이의 선택은 원칙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고 시의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문제인 것이다.
예컨대 종부세 기준을 9억 아니면 6억 중에서 선택하는 문제도 그런 유형이다. 6억 원에서 9억 원까지의 부동산을 보유한 사람들은 기준이 6억이라면 낼 세금을 9억이라면 안 내게 된다. 세금으로 낸다는 것은 그 재원으로 마련될 복지나 공공서비스 만큼을 전체국민이 평등하게 누린다는 것이고, 안 낸다는 것은 세금만큼을 그들이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간략하게 그리고 좀 현학적인 표현을 써서 정리하고자 할 때 "평등과 자유 사이의 선택"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런 쟁점의 본질은 종부세 기준을 9억 원으로 하느냐 6억 원으로 하느냐에 있지, 평등과 자유 중에서 어떤 것이 우선하는지에 관한 보편적인 답을 구하는 데에 있지 않다.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정책 논쟁들이 한 단면만을 굳이 부각해서 본다면 평등과 자유 사이의 문제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모든 쟁점들에 관해서 평등편만 선택하든지 자유편으로만 선택을 하게 되면 사회적으로 엄청난 재앙이 발생하고 말 것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거니와, 자유와 평등의 중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중용 따위 발상은 흐리멍텅한 두루뭉수리 얼버무림이나 무의미한 방관자의 둔사로 빠질 위험이 높다고 본다. 따라서 그런 단어는 순응주의자들에게나 던져주고, 주권의식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담론에서는 가능하면 쓰지 않기를 바란다. 내 주장의 요체는 정치적 쟁점을 원칙의 문제로 접근하지 말고 시의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 이에 관해서 불안감을 느낄 사람들이 대단히 많겠지만, 본격적인 논의는 제4부로 미룬다.
제2절 리버럴과 진보
군대를 등에 업고 헌법을 졸지에 정지시킨 쿠데타를 통해 이른바 유신헌법을 만든 박정희는 자유민주주의는 한국에 잘 맞지 않는다는 핑계를 걸었다. 적어도 당시 한국 사회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는 사실은 인정한 셈이다.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를 비판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위해서 투쟁했다. 그런데 1987년 이후 지금까지는 용어가 아주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김종필이 자유민주연합을 한때 이끌었고, 그 후로는 뉴라이트라는 사람들이 시장의 자유를 자유주의와 동일시하며 이런 용어의 선점에 대해 진보쪽에 있는 사람들이 특별히 시비를 걸지도 않는다. 자유민주주의 또는 자유주의란 이제 한국에서 보수주의와 대동소이한 뜻으로 사용되고 이해된다.
굳이 설명하자면 세 가지 정도의 이유를 댈 수 있겠다. 첫째, 사회주의에 대척되는 것으로 이해하면 자유주의는 보수처럼 비칠 수 있다. 둘째, 자유주의든 사회주의든 영국식으로 느슨하게 이해하는 태도보다는 독일처럼 명확한 경계를 구하는 태도가 한국 사회에 팽배하다. 셋째, 추상적인 용어의 의미나 일관적인 사용에 대해 한국사회가 별로 집요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물타기나 되치기가 쉽게 일어난다. 이중 둘째, 영국식으로 느슨한 이해를 간단하게 엿보기로 한다.
영어에서 리버럴(liberal)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인 형용사로서 변화에 대해 개방적이고 차이에 대해 관용적이며 약자에 대해 너그러운 태도를 뜻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자유주의 역시 기본적으로 무언가에 대해 개방적이며 관용적이며 너그러운 태도를 함축한다. 개방과 관용의 영역 및 방향에 따라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자유주의로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다.
경제적 자유주의란 전형적인 시장주의경제이론을 말한다. 시장의 자유경쟁이 단기적으로는 시행착오라는 낭비를 낳지만, 장기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자원배분으로 이어진다는 믿음 아래 정부나 사회 권력에 의한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복지국가의 이념까지도 사회주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미제스나 하이에크 등,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 로버트 노직과 같은 자유지상주의자, 그리고 정책적으로는 영국 보수당이나 미국 공화당의 입장에 가깝다.
정치적 자유주의란 개인의 권리를 중요시하고, 표현과 반대의 자유를 신봉하는 태도를 말한다. 사유재산제도와 기득권을 인정하지만, 정치적 경쟁을 통해서 합법적인 수단으로 헌정질서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수용한다. 따라서 사회주의 정당의 활동도 자유롭게 허용되어야 한다고 보고, 사회주의 정당의 집권도 개인의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다면 자유주의의 틀 안에 속한다고 본다. 존 스튜어트 밀, 존 롤스 등이 대표적이다.
사회적 자유주의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치적, 사법적, 경제적, 사회적 평등을 향해 개방적인 태도를 말한다. 빈곤으로 말미암아 생활환경에 제약이 가해짐으로써 기회 자체가 불평등해질 수 있는 여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토마스 힐 그린, 레너드 홉하우스 등 자유당 좌파들이 원조에 해당하고, 존 메이나드 케인스나 윌리엄 베버리지 등 20세기초 영국 노동당 정부의 복지국가 모형을 마련한 사람들도 여기에 해당한다. 미국 민주당은 영국 노동당 만큼은 아니지만 대체로 사회적 자유주의의 입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문화적 자유주의란 '60년대의 히피와 같은 반문화, 동성애자나 소수 종족집단과 같은 문화적 소수자 등도 주류 사회와 마찬가지로 동등한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사형제에 반대하고, 온갖 형태의 생태주의 공동체를 실천하며, 전통적인 가족형태나 성역할이 표준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모든 종류의 개인적 신조를 양심과 종교의 이름으로 보호해줘야 한다는 입장 등이 여기에 속한다.
한국사회는 1987년 이전까지는 자유민주주의와는 정반대인 전체주의 사회였다. 많은 사람들이 '87년을 민주화라고 부르지만 이는 지극히 통속적인 언표의 습관일 뿐이고, 내가 보기에는 위에 열거한 네 차원의 자유주의 가운데 어떤 것도 한국사회에는 정착된 것이 없다. 정부에 대한 개인의 권리, 법 앞에 평등, 표현의 자유와 같은 항목들은 불과 일이십년 사이에 정착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말하는 "시장경제"란 관치경제의 다른 이름으로서, 전체주의를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부른 박정희식 지록위마의 재판이다. 뉴라이트에서 부르짖는 자유란 부자의 자유를 뜻할 뿐으로, 경제적 자유주의의 한 형태로 잡아주기에도 곤란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이며 협량하다. "곤들메기의 자유란 붕어에게는 죽음"이라는 사실은 경제적 자유주의자들도 대체로 인정하는 원리인 것이다. 다시 말해 자유주의의 변역이 아무리 넓더라도, 사회구성원 중 일부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노선을 자유의 이름으로 강행하는 행태까지 포함하기는 어렵다.
한국사회에서 뉴라이트나 한나라당이 자유주의라는 간판을 내걸고 행세할 수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한국사회의 진보진영이 얼마나 종파적으로 사고하는지, 그리고 정치적 어휘에 관한 이해가 얼마나 얕은지를 보여주는 지표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유와 평등을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킨 후에, 자기는 평등편이라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자유라는 귀중한 가치의 정합성을 쉽게 포기해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사회에서는 자유주의가, 문화적 자유주의는 물론이고, 정치적 사회적 자유주의뿐 아니라 경제적 자유주의에 들어있는 일부 관념조차도 여전히 진보의 아젠다가 되어야 하며, 이명박 체제의 한나라당이나 뉴라이트는 자유주의라기보다는 독점과 특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파시스트 또는 전체주의에 가깝다고 본다.
제3절 사회주의의 다양한 모습들
변종과 의미가 다양한 것은 사회주의도 마찬가지다. 일례로 영어 위키피디아(Wikipedia)만 봐도, 아프리카 사회주의, 아랍 사회주의 등 민족적 변형을 포함해서, 민주사회주의, 녹색사회주의, 길드사회주의,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 시장사회주의, 혁명적 사회주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적 무정부주의, 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 시장경제, 등의 갈래들을 열거해 놓았다.
여기서 이런 갈래들을 일일이 설명하고, 또 갈래들 사이의 관계를 해명할 수는 없다. 단, 이와 같은 다양성을 직시함으로써 사회주의라는 것이 어떤 하나의 단일한 교조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지리적 시간적 정치적 환경의 다양한 맥락에 따라서 무한한 변형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용어라는 사실을 우리사회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깨닫기를 바란다. 그럼으로써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각각 단일목표를 지향하면서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이념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언제든 시의에 따라서 접합과 동맹이 가능한 지향성으로 이해하는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기를 바란다.
사회주의 가운데 자유주의와 합치하기 어려운 경우는 자본주의를 타도대상으로 보는 형태와 국가가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직접 개입하려는 형태뿐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권리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예컨대 살인마라고 할지라도 체포나 사법처리과정에서 인권을 누려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개인들의 이기적인 행태를 단지 이기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처벌할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반면에 이기심이든 이타심이든 동기는 여하간에, 행동의 결과가 형법에 어긋난다면 처벌대상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체제는 자본가들의 탐욕 자체를 문제시하기보다는, 탐욕을 추구하는 행동방식에 일정한 한도를 설정해 둔 다음 한도를 넘는 경우만을 규제한다.
반면에 혁명적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자체를 무너뜨리고 완전히 새로운 체제를 건설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 시각에서는 자유주의가 자본주의나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타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물론 자유주의 체제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도 표현의 자유를 용인하고, 그들이 혁명이론을 선전한다는 이유만으로 박해를 가하지는 않는다. 다만 예컨대 어떤 무력이나 암살 등, 폭력적인 방법으로 정부전복을 기도한다면 당연히 처벌대상이 된다. 단적인 예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온상인 영국의 런던에서 살면서 『자본』을 저술할 수 있었다. 영국 사회가 그를 특별히 도와주지도 않았지만 특별히 박해하지도 않았다.
개인생활의 어떤 부문이라도 국가가 필요하다면 간섭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발상, 즉 줄여서 국가사회주의라고 종종 불리는 발상 역시 자유주의와는 근본적으로 충돌한다. 자유주의는 어떤 공공목적이나 국가의 필요를 명분으로 삼더라도 결코 침범해서는 안 될 개인 사생활의 영역이 확보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단, 위와 마찬가지로 자유주의 체제는 국가사회주의에게도 표현의 기회는 부여한다. 반면에 국가사회주의 체제에서라면 자유주의에 입각한 주장마저 봉쇄되기가 쉽다. 영어에서는 이런 형태를 보통 State Socialism이라고 부르는데, 히틀러의 것만은 National Socialism이라고 부른다. 히틀러가 Nationalsozialist를 자칭했기 때문이다. 나치(Nazi)란 이를 줄인 말이다.
제3장에서부터 지금까지의 논의는 기본적으로 정치적 이념과 지향성의 차이를 이분법적으로 보는 태도보다는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이해하는 태도가 인식론적으로 개방적이라는 취지를 부각하기 위한 것이다. 즉, "진정한" 진보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보수로 몰아붙이려는 태도, 또는 자유주의를 보수이념으로 당연시하는 태도는 얼핏 정책적 정향에서 진보인 것처럼 보이지만, 인식론적인 자세로서는 극우파의 색깔론만큼 이나 대단히 교조적이며 배타적인 태도로서, 대개는 보수적인 성향에 해당한다. 이런 태도는 당연히 범진보에 속하는 다양한 세력의 연합을 불가능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부동층에 속하는 유권자들로 하여금 진보라는 것을 어떤 밀교 비슷한 불가해한 운동으로 경원하게 만든다.
/박동천 전북대 교수
[3]
스누라이프에 올라왔던 글 중에서
좌파는 기본적으로 노동자/농민을 계급기반으로 하고 있는 정치세력이어야 합니다.
우파의 반대말은 맞지만 우파가 아니라고 모두 좌파는 아닙니다.
그리고 우파는 대체로 보수적인 것은 맞습니다만 우파의 반대가 진보 = 좌파도 아닙니다.
진보는 사회의 맥락에 따라 달라질수 있는 말입니다.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는 A이념이 진보일 수 있고, 다른 역사적 상황에서는 A가 보수일 수 있죠. 예컨대 프랑스 혁명시기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진보였지만 지금은 보수라고 하기도 그렇지만 '진보'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자유선진당처럼 '자유주의'가 부정적으로 인용되어 기묘하게 재해석되기도 하죠.
예를 들어, 한국의 내셔널리즘 (번역하기 어려워서 이렇게 씁니다) 은 진보인지 보수인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한국의 진보세력이 사용하는 내셔널리즘은 분단이라는 모순과 분단을 매개로 한 다양한 폭압에 저항하는 개념-즉 '제3세계의 민족주의'와 같은 개념이고, 반면 보수가 사용하는 내셔널리즘은 국가와 군대, 그것을 유지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복무하는 국가주의와 같은 개념입니다.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샜나요. 어쨌든 포인트는 진보-보수와, 좌파-우파는 다른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진보와 보수는 시대에 따라 스펙트럼이 달라질 수 있지만 좌파-우파는 적어도 개념상 그렇지 않다는 것. 따라서 '친북좌파'라는 말이 얼마나 어이없는 조합인지 아시겠죠? 친북좌파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민족주의 세력이 진보운동을 하다보니, 그들이 노동자 해방을 함께 외치기 때문에 나온 말일 수 있겠네요. 하지만 이 말은 보수 언론과 보수 정치세력이 '북한'이라는 괴물과 '진보'전체를 정치적으로 공격적으로 만들기 위해 지어낸 개념입니다. 기본적으로 친북좌파라는 말은 그 자체가 화학적으로 결합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노무현은 따라서 좌파가 아닙니다.
그가 추진했던 경제정책은 FTA와 같은 것으로, 지극히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자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진보세력 일각에서는 '노무현 퇴진' 운동을 FTA 반대 운동과 함께 했던 것이었구요. 노무현의 지지율이 추락한 것은 그것 때문입니다. '서민경제'를 주장해서 자신이 노동자-농민을 기반으로한 서민들을 위해 정책을 펴겠다고 약속했고, 그래서 보수세력에게는 태생적으로 미움을 받았고 그 이후로도 사랑받지 못했지만 지지를 받았었던 진보세력에게 마저 버림을 받고 나자 아무도 그를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옛날 박정희 정권 시절에 노무현과 노무현 지지그룹 -즉 386- 이 운동권이었고 민주화운동을 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좌파로 분류한다는 사람이 있는데요. 그것도 틀립니다. 좌파는 아까 말씀드렸듯이 노동자-농민을 기반으로 해야합니다. 그들이 과거 운동권 시절에는 그랬을지 모르나 지금은 중도 우파, 혹은 중도, 최장집의 분류에 따르면 심지어 보수 양대 정당중 하나의 구성원일 뿐입니다. 그들은 그냥 '민주화 운동세력'에 불과한 것이죠.
과거 한국의 사회운동은 독재에 대한 '반독재'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이들을 '진보'로 말할 수 있었지만, 이제 사회가 이미 민주주의를 성취한 상황에서는 '사회주의'보다는 오른쪽일지라도 경제적 민주주의와 실질적민주주의를 말하는 세력이 진보가 되었습니다. 이제 기존의 386세력이나 민주화운동세력을 진보로 말하기는 면구한 실정입니다. (김영삼도 그렇게 치면 진보게요?) 진보는 변하는 개념이니까요.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현재 '진보정당'으로 분류될 수 있는 정당은 진보신당/사회당/민주노동당 정도구요. 좌파정당이라고 직접적으로 부를만한 정당은 없습니다. 민주노동당은 '진보적인 민족주의'를 사수하고 있고, 진보신당은 명시적으로 어떤 계급적 기반을 갖추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진보의 담론을 제시하고 있다고 봐야죠.
우리나라 정치세력에서 '좌파'나 '좌파 빨갱이'라는 말이 적절하지 않음에도 이 말이 널리 수용되고 있는 것은, 보수 세력의 득세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보다 정치적으로 조금 좌이면 우리나라의 분단과 북한에 대한 레드컴플렉스를 이용해서 '친북좌파' 혹은 '빨갱이'라고 이름붙이고 공격해왔습니다. 70년대와 80년대는 공권력이 그것을 했고, 90년대 이후로는 언론이 그것을 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촛불집회의 '배후론'이 만약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치참여와 비판이 없었다면 그대로 '배후 빨갱이론' '민주노동당 조직론'으로 까지 발전해 나갔을 겁니다.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레드컴플렉스지요.
노무현을 '좌파'로 공격하고 정치적으로 매장시킨 것은 적극적으로 조중동의 공이었습니다. 그렇게 공격함으로써 보수세력은 노무현과 노무현을 지지하는 여러 정치세력을 '빨갱이'로 몰아붙일 수 있었죠. 국가보안법 폐지/사학법 개정/역사청산 등의 중요한 이슈는 그렇게 이념적으로 공격받고 사라져 갔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언론과 보수 정치세력의 탓입니다. 그러나 정작 진보세력이나 좌파는 노무현을 '좌파'라고 하면 경기를 일으키죠.
언론의 '노무현 좌파'론은 성공했습니다. 그렇게 착각한 많은 국민들이 진보와 좌파를 설익은 노무현과 헷갈려 총체적으로 증오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해 보수에 대한 절대적 지지, 그리고 이명박에 대한 절대적 지지로 나타나게 된 거죠. 정작 자기 인생을 돌이켜보면 이명박을 지지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말이지요.
+) 진짜 '합리적 보수주의자'라는 지지를 받는 전원책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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