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하루 종일 4권의 소설책을 읽었다. 워낙 속독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지만 4권 모두 재미있어서 전자도서관에서 대여하는 족족 쉬지 않고 끝까지 읽어버렸다. 백수린의 <눈부신 안부>, 권여선의 <각각의 계절>, 장류진의 <연수>, 은희경의 <빛의 과거> 순으로 읽었는데 저마다 다른 매력이 있었다. 특히 가장 마지막으로 읽은 <빛의 과거>는 가장 어두운 소설이기도 하고 내게 가장 깊은 여운을 남겼기 때문에 그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소설은 70년대 어느 여대 기숙사를 배경으로 한 '나'와 이후 40년이 흐른 뒤의 '나'가 교차하며 등장하는 방식으로 서술된다.
70년대 여대 기숙사의 풍경은 무척이나 부산스럽고 생생하고 활기가 넘친다. 매일 밤 통금 시간에 걸리지 않기 위해 기숙사 대문 앞 오르막길을 헉헉거리며 뛰어들어오고, 기숙사 방 안에서 네 명의 룸메이트들은 주로 미팅이나 남자친구에 대해 방대한 수다를 나누며, 아직 훼손되지 않은 저마다의 개성을 찬란하게 발산한다.
나는 말을 더듬는 증상이 있어 그것을 감추기 위해 아예 말이 적은 사람인 척 한다. 그것은 점점 나의 성격을 형성하게 되는데, 회피와 자책을 거듭하며 스스로를 생채기내고 중년의 나이에 이르러서는 아주 냉소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시니컬함은 '김희진'이라는 오랜 친구(라기보다는 지인에 가까운)와 나의 가장 큰 공통점이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중반부까지는 나를 대놓고 들러리 취급하며 끊임없이 하대하고 빈정거리는 희진과 화자가 왜 오랜 친구 관계를 유지하는건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책의 후반부에 이르러 깨닫게 된 건 '나'가 문제를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는 대신 회피와 망각을 선택하고 그에 대한 자기 반성을 반복하며, 희진의 빈정과 무시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학적인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나와 희진은 시니컬한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동시에 그 시니컬함은 아주 다른 방식으로 발현된다. 나의 시니컬함이 주로 '나 자신'을 향하는 것이라면 희진의 시니컬함은 '나 아닌 모든 사람'을 향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희진이 묘사하는 화자의 모습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 할지라도 나에게는 연민이 드는 반면, 희진에게는 화가 나고 안타까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앞으로 회피와 자기 비하가 아닌, 직시와 자기 반성의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내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결코 버리지 않고, 변하지 않는 뿌리로 삼는 것이 그 비결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나를 충분히 사랑하는 것과 더불어 내 주변에도 용기 내어 애정을 쏟는 것도.
마침 연이어 읽고 있는 <일간 이슬아 수필집>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해 옮겨 적는다.
"우리를 고유하게 하는 이유의 대부분은 타인에게 있다는 걸 말이다. 남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이따금 겨우 특별해지곤 했다. 세계에 오직 나만 있다면 고유성이랄지 유일함이랄지 그런 말들은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존재는 타인과 맺는 관계에 의해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되는데, 그건 축복일까 저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