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주 오랜만에 미술관에 왔다. 인스타그램 피드를 쭉 훑다가 마음에 드는 전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스웨덴의 명절 미드소마를 배경으로 한 다크하고 위트 있는 매력적인 그림들이었다.
아트선재센터는 처음 방문했는데, 삼청동의 왠만한 갤러리들은 모두 무료로 전시를 둘러볼 수 있기 때문에 유료로 입장하는 곳은 잘 가지 않았던 탓이다. 1층에는 작은 서점과 의류 매장이 있고 전시는 3층까지 이어져 오천원이라는 입장권이 썩 비싸게 느껴지지 않았다. 서점에 나열된 책들에서 오랜만에 읽은 무가치하고 미학적인 문장들이 좋았고, 작은 기대를 품고 간 켄트 이베뮈르의 그림들이 생각보다 더 좋았다.
2.
한때는 미술관에 가는 것을 취미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주말마다 전시를 보러 다녔다. 평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주말 동안 전시를 보고 서점에 가고 영화를 보았다.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 좋아하는 것을 경험하는 삶의 밸런스가 완벽히 맞춰진 나날들이었다. 전시 보는 것을 좋아했던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아주 쾌적한 산책이기 때문이다. 쾌적한 장소를 무료로 점유하며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미술관이라는 공간은 마이너스 칼로리의 시간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이어서,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적 신념을 갖고 있던 이십대의 나에게 전시 산책이라는 활동은 그렇게 유용했다.
3.
2019년, 내가 서른살이 되던 해 페미니즘 열풍이 불었다. 페미니즘의 가치가 퇴색된 남성 혐오 열풍이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만 어쨌든 좋은 의미로, 관람되고 바라보아지는 대상으로서의 여성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비판의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건 중요한 시대적 패러다임의 변화다.
나는 (내 또래의 많은 여자애들이 그러했듯) 엄마에게서 외모의 가치에 대한 강박적 신념을 주입받으며 자랐다. 아마 엄마도, 여자를 외모적 가치를 지닌 상품으로서 바라보는 구시대적 패러다임의 피해자였을 것이다. 날씬해야 아름답고 가치있는 존재가 된다는 신념 vs. 먹는 것을 좋아하고 살이 잘 찌는 체질 간의 괴리는 내게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야기했다. 하루에 정해진 칼로리만 먹어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과 약속을 잡지 않고 고립되는 편을 택했다. 과식 다음날 하루 종일 금식을 하고 그 다음날 다시 폭식하거나 씹뱉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피폐해졌다. 나를 통제할 수 없고 내가 나를 파괴한다는 의식은 자존감을 한없이 떨어지게 만들었다.
이십 대에는, 그래도 젊은 에너지로 악으로 버텼던 것 같다. 서른 살이 되면서 팽팽한 실이 끊어지듯 우울증이 찾아왔다. 정신과에 방문해서야 비로소 내가 왜 통제되지 않는가가 아닌 내가 왜 나를 통제하려 하는가로 문제의 초점을 돌릴 수 있었다. 스스로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닌 연민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건 연민이라는 감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 달 정도만 약을 먹고 상담을 받으며 금방 증상이 호전될 수 있었던 건, 그동안 일기 쓰는 습관을 통해 내 안의 뒤엉킨 생각과 감정을 바닥까지 들여다보는 훈련이 되어 있었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정신과 상담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나의 삶을 반추하며 내가 왜 이런 사람이 되는 데에 이르렀는지 파악하고, 내가 외면했던 부분까지 포함한 <총체적 나>를 마주하는 과정이다. 나를 왜곡 없이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 내가 외면했던 나와 화해하는 것.
4.
식이를 통제하지 않음으로써 정서적 안정을 찾은 대신 5키로 정도가 쪘다. 섭취 칼로리가 늘어남과 함께 재택 근무를 시작하면서 운동량이 확 줄었기 때문이다. 저녁까지 먹고 일하다가 로그아웃을 하면 8시쯤 되는데, 그 시간엔 쇼핑몰이나 미술관도 문을 닫고 미세먼지 때문에 밖에 나가 산책을 할 수도 없다. 저녁을 많이 먹고 몸이 무거운 상태에서 홈트를 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다시 아침 홈트를 시작하려고 한다. 이번 설 연휴 동안 실내 자전거도 주문해서 저녁 근무 후에 타야겠다. 몇 년 전 멀쩡한 엑스바이크를 중고나라로 팔아버렸던 이유가 무엇인지 잘 기억은 안나지만.
5.
작년 8월에 이직을 했고 이제 5개월 정도가 지났다. 매력을 느꼈던 데이터 마케팅이라는 분야에 몸을 담그게 되었다는 허울 외에는, 업무 강도도 커졌고 스트레스도 심해지고 심지어 연차를 깎으면서 월급도 줄었기에.... 실로 손해본 게 훨씬 큰 셈이다. 익숙하지 않은 일인데다 배경 지식이나 스킬도 없고, 아직 SQL 초보인데 실 전체 테이블 관할을 맡게 되어서 이제 더욱 극심한 고생길이 펼쳐질 예정. 개인주의가 심하고 영어를 남발하는 회사 문화도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이직을 함과 동시에 부동산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강사는 부동산으로 200억원의 자산을 구축한 사람인데, 투자의 기본 방법론을 가르쳐 줌과 함께 성공적인 투자를 하려면 <인생의 우선순위를 부동산 투자에 놓고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으세요> 라고 강조한다.
아직 부동산 투자에 올인하기에는 회사 생활도 불안정하고,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하다 (이게 제일 흔한 핑계에요, 라고 강의에서는 말한다). 그렇다고 일과 휴식에만 올인하기에는 부동산 활황을 겪으며 벼락 거지가 되버린 내 신세가 불안해 견딜 수 없다. 그래서 부동산 강의를 듣기는 하는데 딱히 액션 플랜으로 옮기지는 못하고 또 밖에 나가 놀자니 돈을 쓰는 게 죄책감이 들고 그래서 집에 틀어 박혀 티빙이나 유투브를 주구장창 보면서 현실도피를 하는 요즘이다.
부동산 투자를 해서 구겨진 팔자를 펴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내가 쏟을 수 있는 에너지의 한도를 감안해야 할 것 같다.
6.
할 일.
부동산 투자 시점 정하기. 앞마당 넓히기 & 임장 보고서 & 내집마련경험담 필사 꾸준히. 매일 아침 운동 루틴. 재택일지라도 옷 갈아입고 일하기. 바른 자세로 일하고 스트레칭 많이 해주기. 저녁에 과식 안하기(아침 점심 저녁 균형 있게 먹기). 데이터 마케팅 관련 독서.
부지런히 살되 지금의 행복도 소중히 여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