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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에 모래는 고개를 돌렸다. 그 말이 모래를 어떻게 아프게 할지 나는 알았다. 나는 고의로 그 말을 했다. 너처럼 부족함 없이 자란 애가 우리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네가 아무리 사려 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네가 뭘 알아, 네가 뭘. 그건 마음이 구겨져 있는 사람 특유의 과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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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공무와 나는 둘이 만났다. 명동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밖으로 나오니 좋은 날씨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계속 걸었다. 종로3가에 줄을 지어 있던 가위바위보 게임기에서 돈을 잃기도 하고, 인사동을 지나면서 과일주스를 사 먹기도 했다.
“이제 어디로 갈까?” 공무의 물음에 나는 경복궁을 지나 부암동 쪽으로 가보자고 말했다. 그렇게 걸으면서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고 오히려 힘이 나는 느낌이었다. 커다란 가로수가 늘어선 언덕길을 올라가면서도 기운이 났다. 부암동에 다다라서는 길가에 서서 아래로 작게 보이는 주택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기도 했다.“어디로 가고 싶어?” 공무가 다시 물었고 나는 백사실계곡으로 가는 길이 적힌 표지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우리는 언덕을 올라가서 계곡 입구에 갔다.
계곡의 바위에 앉아서 우리는 하던 말을 모두 접고 물 흐르는 소리와 바람에 나뭇잎들이 쓸리는 소리를 들었다. 비를 맞은 낙엽이 흙에 섞이는 냄새를 맡았다. 우리는 해가 다 질 때까지 그곳에 앉아 있었다. 올라올 때는 더웠지만 물가에 오래 앉아 있으려니 추웠다.
그때 나는 공무와 포옹하고 싶었다. 만약 내 옆에 모래가 있었더라도 나는 똑같은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그애를 껴안아 책의 귀퉁이를 접듯이 시간의 한 부분을 접고 싶었다. 언젠가 다시 펴볼 수 있도록, 기억할 수 있도록. 그러나 스물둘의 나는 공무를 포옹하지 않았다. 다만 젖은 바위에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버둥거리며 비탈을 내려왔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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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나는 내가 졸업 이후에도 변변한 일자리를 잡지 못하리라는 것을 몰랐다. 무리한 대출을 받아가며 대학원에 입학하게 될 것도, 그곳에서 처음으로 연애를 하고, 졸업과 취직을 하고, 오래 연애한 남자와 파혼하고 한동안은 매일 술을 마시지않으면 잠들지 못하리라는 것도 몰랐다. 아무렇지 않게 서른 살의 허들을 넘고 원래 그 나이로 살아온 사람처럼 능청을 떨게 될 것도, 최승자의 시집을 읽으며 간신히 버티던 스물셋의 가을 같은 건 어린 날의 유약한 감상이었다고 과거의 나를 평하게 되리라는 것도 몰랐다.
그 모든 사실을 모른 채로 스물셋의 나는 공무와 수원성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나에게도, 앞으로 조금씩 멀어지게 될 공무와 나의 모습을 그려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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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식으로 내가 나를 따돌렸던 것 같아. 너희에게 보여주지 못할 정도로 미워 보이고 창피했던 내 모습을 따돌렸어. 예전부터 그랬었어. 왜 내 모습이 그렇게 부끄러웠을까. 왜 나 스스로가 그렇게도 못나 보였을까. 저리 가. 나는 그 애에게 말했어. 내 눈에도, 남들 눈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어. 왜 너는 죽지도 않아? 사라지지도 않고 그대로 내 안안에 남아 있어? 그렇게 거칠게 나를 대하는 게 어른이 되는 것인 줄 알고서.
예전 일들을 잊고, 지워버리고, 연연하지 않으려 하고, 내 안에 갇힌 그애가 추워하면 더 외면해서 얼어죽기를 바라고, 배고파하면 그대로 굶어 죽기를 바라면서 겉으로는 평온한 사람이 된 것처럼 연기했지. 그게 다 뭐였을까. 그애는 나였는데.
최은영, <모래로 지은 집> 중에서
마음과 마음 사이의 미묘한 거리, 관계의 세밀함에 대해 이토록 치열하고 정교한 묘사는 오랜만에 읽어보는 듯하다. 최근 읽은 것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든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