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는 컵 하나를 가지고 보디와 마인드와 스피릿을 설명하셨지요. 우주와 나의 거리가 당겨진 흥분감에 저는 며칠 동안 잠을 못 이뤘어요.
하하. 지금까지 유명한 철학자의 말은 다 어려웠어요. 어렵게 얘기해야 그 사람 이름이 오래 남거든. 음식 먹고 체해야 뭘 먹었는지 생각하지. 소화 잘 되면 뭐 먹었는지 기억이나 해요? 그래도 내가 다시 쉽게 말해줄게요.
여기 컵이 있죠? 이게 육체예요. 죽음이 뭔가? 이 컵이 깨지는 거예요. 유리그릇이 깨지고 도자기가 깨지듯 내 몸이 깨지는 거죠. 그러면 담겨 있던 내 욕망도 감정도 쏟아져요. 출세하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고 돈 벌고 싶은 그 마음도 사라져. 안 사라지는 건? 원래 컵 안에 있었던 공간이에요. 비어 있던 컵의 공간. 그게 은하수까지 닿는 스피릿, 영성이에요.
봄 여름 가을 겨울… 살면서 어느 계절을 가장 사랑하셨나요?
여름을 좋아했어요. 햇빛이 꽉 차오르는 여름, 그것도 그림자까지 사라지는 정오. 그게 생의 절정의 이미지였어요. 지금은 안 그래. 끝이 없는 눈벌판에 눈 쌓인 오두막집 풍경이 좋아요. 바깥은 희고 춥고 어둡고, 안은 밝고 노랗고 따뜻하죠. 장작 난로가 타들어 가면 혼자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그런 겨울…
“때가 되었구나. 겨울이 오고 있구나… 죽음이 계절처럼 오고 있구나. 그러니 내가 받았던 빛나는 선물을 나는 돌려주려고 해요”라고 그는 내게 말했었다.
마지막으로 여쭐게요.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고, 탄생의 그 자리로 나는 돌아간다’는 말씀에는 변함이 없으신지요?
변함없어요. 생은 선물이고 나는 컵의 빈 공간과 맞닿은 태초의 은하수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또 한 번 겸허히 고백하자면, 나는 살아 있는 의식으로 죽음을 말했어요. 진짜 죽음은… 슬픔조차 인식할 수 없는 상태, 그래서 참 슬픈 거지요.
그 슬픔에 이르기 전에 전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별을 보며 즐거웠어요. 하늘의 별의 위치가 불가사의하게 질서정연하듯, 여러분의 마음의 별인 도덕률도 몸 안에서 그렇다는 걸 잊지 마세요. ‘인간이 선하다는 것’을 믿으세요. 그 마음을 나누어 가지며 여러분과 작별합니다.
-
2022년 2월 중순, 그는 나를 불러 가만히 눈을 감고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깜깜한 밤중이었네. 내가 가장 외롭고 괴로운 순간이지.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어. 누군가 하고 봤더니 노래하는 장사익이야. 그이가 집에서 쓰던 기계를 다 챙겨와서 내 앞에서 노래를 불러줬다네. 1인 콘서트를 한 거야.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 한 곡이 끝나고 또 한 곡… 당신은 찔레꽃, 찔레꽃처럼 울었지… 너무나 애절했어. 너무나 아름다웠지. (침묵)이런 세상이 계속됐으면 좋겠어. 글로 써주게. 사람들에게, 너무 아름다웠다고, 정말 고마웠다고.”
거실 깊숙이 2월의 햇살이 비쳐 들었다.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입술로도 그는 이야기꾼이 산신령을 만나러 가던 이야기를 이어갔고, 천천히 넘어가는 태양의 온기를 즐겼다. 지난번 만남에서 김용호 사진작가가 선물한 머리에 전등을 단 조명 작품 ‘모던보이’가 당신을 닮았다고 하자 어서 책상 위에 올려놓고 불을 켜라고 기쁘게 다그쳤다. 몸의 형상인 흰 도자기 위 동그란 머리 전구에 불빛이 들어오자 그가 흡족하게 말했다.
“저게 나야!”
그 말이 너무도 선명해서 잊히지 않는다.
2월 26일 정오경. 환한 대낮에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선생은 죽음과 따뜻하게 포옹했다.
- 김지수 인터뷰집 <위대한 대화> 중에서, 문학평론가 이어령 인터뷰 내용 중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 지나가는 밤 (0) | 2023.08.19 |
---|---|
책 / 후회가 우리를 더 인간답게 만듭니다 (0) | 2023.08.19 |
책 / 그 여름 (0) | 2023.08.17 |
고요한 사건 (1) | 2023.08.11 |
한 시절을 건너게 해준 (0) | 2023.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