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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미, 이방인

유연하고단단하게 2020. 12. 1. 20:27




1.
그 길을 걸을 때, 그녀는 한 번도 눈을 감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을 최대한 실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앞으로 성인 키의 네 배는 될 법한 편백나무 수백 그루가 높이 솟아 있었다. 서로 얽힌 가지와 잎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지만 군데군데 눈부신 빛이 떨어져 내렸다. 멈춰서서 고개를 들면 얽힌 나뭇잎 사이로 드문드문 파란 하늘과 구름의 움직임을 볼 수 있었다. 완벽한 색감. 순간, 씁쓸한 웃음이 앙다문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그녀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계속 걷다보면 어떤 풍경이 나올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숲이 끝나는 곳에, 시야에 닿는 건 그저 허공뿐인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었다. 아무런 악의도 없이, 누군가가 세계를 절단내놓은 것 같았다. 무심한 몸짓으로.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녀는 절벽의 끄트머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현기증이 났다. 그녀는 뛰어내리는 순간에 절대로 눈을 감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2.
며칠 후, 그는 양손에 레토르트 식품과 절인 과일, 그리고 초콜릿과 젤리가 가득 든 봉지를 들고 그녀를 찾아왔다. 그녀는 그가 보는 앞에서 봉지째 쓰레기통에 쑤셔넣었다. 그다음에 그는 살인사건 파일을 들고 왔다. 그녀는 그걸 찢어버렸다. 그는 약지로 눈썹뼈를 긁으며 말했다. “그럴 줄 알고, 복사본을 가지고 온 거거든요.”
여름용 자주색 셔츠가 그의 넓고 마른 어깨선을 강조했다. 눈썹이 짙고, 손이 유독 큰 남자였다. 그의 눈동자—대개는 순진해 보였고, 아주 가끔은 마음을 꿰뚫어보는 것 같은—는 갈색이었다. 그는 마치 그녀가 부탁한 걸 준다는 듯이 사건 파일을 건넸다.



3.
떨어지고 싶어, 그녀는 말하고 싶었다. 추락하고 싶어. 난 죽고 싶은 게 아니야. 이해할 수 있어?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난 그저 추락하고 싶은 거야. 난 죽고 싶은 게 아니야. 나는 다시 살아가는 기분을 느끼고 싶은 거야. 내가 나를 배신하지 않기를 바라는 거야.



4.
그녀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갔다. 거리는 조용했다. 어둠에 잠식당한 것 같았다. 도로의 한가운데에 서서 그녀는 두 손으로 양볼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때로는 상처받은 마음이 죽은 사람보다 무겁다고.



5.
그녀는 자신의 몸에 묻은 남자들의 피와 그의 피가 분간이 안 되는 게 너무 싫었다. 그가 자꾸 뭐라고 말을 했다. 그녀는 그에게 말을 하지 말라고, 입을 다물라고 했다. 그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마지막 힘을 다해서. 마치 그날, 그녀가 자살 증강현실 속에 있을 때, 자신을 붙잡았던 그런, 요란하지만, 거칠지 않은 손길로.




-
이보미 소설, <이방인> 중에서




읽는 내내 왕가위 감독 영화의 색감이 떠올랐다. 영화나 뮤직비디오로 만들어진다면 무천 아름다울 것 같은 페미니즘 느와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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