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독일' 지고, '독일의 유럽' 뜬다
편집자 주| 작년 11월 폴란드의 라도슬라브 시코르스키 외무장관은 "독일이 유럽을 위기에서 구할 유일한 나라"라며 "나는 독일의 파워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만, 독일이 행동에 나서지 않는 것이 더 두렵다"고 말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날카로운 풍자가 담긴 이 말은 독일의 위상 변화를 잘 설명한다. 2차 세계대전 패전국에서 유럽의 선도국으로 부상한 독일, 그 배경과 향후 과제를 3회에 걸쳐 살펴본다.
하지만 유로존 재정위기가 2년 이상 지속되면서 '독일의 유럽'은 시들고, '유럽의 독일'이 급부상하고 있다. 권력지형의 급속한 재편과 유럽에서 나홀로 호황을 누리는 독일은 '유럽 속의 중국'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이다. 독일 스스로도 경제 초강대국의 역할에 점차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독일의 부상은 경제적 위상에서 비롯됐다. 특히 제조업 경쟁력은 성장의 밑바탕이 됐다. 또 2000년대 중반 노동시장 개혁 덕분에 재정위기 속에서도 지난 2년간 3% 이상의 성장세를 유지했다. 하지만 독일 앞에 놓인 길은 쉽지 않다. 리더십에 대한 반발이 거세며 해묵은 반독일 정서도 되살아나고 있다.
독일이 유럽의 리더로서의 역할을 의도적으로 노린 것은 아니다. 전후(戰後) 최대의 위기 속에서 독일은 자연스레 중심의 자리를 점하게 됐다. 사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통합을 주도한 국가는 독일이 아닌 프랑스였다. 독일은 헬무트 슈미터에서 헬무트 콜에 이르기까지 독일의 지도자들은 유럽 통합에 큰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유럽의 통합에 독일을 설득해 끌어들인 이는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전 대통령이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는 통화공동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됐다. 반면 독일은 정치적 대의를 위한 경제적 대가로 당시 유럽의 중심 통화였던 마르크화를 포기해 국민들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았다. 유로존 출범 초기 만해도 독일의 정치권은 자국내에서도 리더십이 흔들렸던 셈이다.
◇ 프랑스의 후퇴와 영국의 쇠퇴 = 하지만 EU 출범과 유로화 도입을 가능케 한 마스트리히트 조약 출범 20년이 지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마르크화를 버리고 유로화를 선택한 것은 결과적으로 독일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고, 정치적으로도 독일은 운전자석에 프랑스는 보조석에 앉는 형국이 됐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티머시 가튼 애시 옥스포드대 교수는 유럽을 끌고 가는 힘은 '메르코지(Merkozy)'가 아닌 '메르켈지(Merkelzy)'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메르겔 대통령의 영향력이 훨씬 크다는 의미에서다.
사르코지 대통령마저 이를 인정하는 분위기도 느껴진다. 슈피겔은 "지난해 11월 초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인터뷰에서 사르코지 대통령은 '나의 모든 노력들은 프랑스를 실제 작동하는 시스템, 즉 독일 시스템으로 바꾸는 것이다'며 프랑스 대통령으로서 상상할 수 없었던 발언을 했다"며 유럽의 뒤바뀐 권력지형을 소개했다.
한때 유럽을 호령했던 영국의 위상도 크게 뒤쳐졌다. 런던에 근거지를 둔 싱크탱크인 유럽개혁센터의 찰스 그랜트 국장은 지난해 12월 뉴욕타임즈(NYT)에 "독일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유럽의 리더"라며 "프랑스는 독일에 분명코 종속됐고 영국은 과거 어느 때보다 영향력이 감소했다"고 지적했다. 앞서 지난 1월 말 세계경제포럼(WEF) 연례회의에서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유로존 위기는 재정 적자가 아닌 (독일과의 교역에서 발생한) 무역적자의 문제"라며 독일을 싸잡아 비난했지만, 영국 언론인 파이낸셜타임스(FT)는 독일에게 유럽의 리더십을 빼앗긴 영국 정치인들의 오래되고 깊은 좌절감의 표출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 탄탄한 제조업, 성장의 토대...'유럽의 중국'이란 비판도 = 독일은 재정위기 속에서도 성장세를 지속했기 때문에 입지가 더욱 탄탄해졌다. 2010년과 2011년 독일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각각 3.7%, 3.0%를 기록했다. 이 시기, 프랑스는 1.4%, 1.7%, 영국은 2.1%, 0.8%를 나타내 대조를 이뤘다. 유럽위원회(EC)는 유로존이 이미 완만한 경기후퇴(리세션)에 진입했다면서도 독일은 올해 0.6%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독일은 제조업체들의 수출 호황에 힘입어 호황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1990년대 줄곧 GDP 대비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해온 독일은 2000년대 들어 흑자국으로 변모했으며 2005년 이후로는 5~7%선을 유지하고 있다. 영국과 이탈리아는 2000년대 들어, 프랑스는 2000년대 중반 이후 경상수지 적자를 나타내고 있다.
급속한 위상 변화와 별개로, 주변국들의 경기 침체 속에서 '나홀로'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점에서 독일은 '유럽의 중국'이라고도 불린다.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인위적인 위안화 평가절하로 미국의 경제 회복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이유로 중국이 워싱턴으로부터 비난을 듣는 것처럼 유럽 내에선 독일이 유사한 비난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 독일이 리더로서 풀어야할 숙제 = 독일의 경제 모델이 이웃 국가들의 모범 사례로 언급되고 있지만 독일의 부상에 대해선 경계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최근 그리스의 유명한 저널리스트 게오르기오스 트랑가스가 독일 총리를 원색적으로 비난했다가 벌금형을 선고받은 사례는 가혹한 긴축정책 아래에 있는 남유럽 국민들의 독일에 대한 감정을 잘 보여준다.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독일이 경제적으로 그리스를 지배하려고 한다면서 빈번하게 독일을 비난해온 트랑가스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베를린의 매춘부'라고 지난해 9월과 10월 지칭한 뒤 방송에서 욕설을 했고 메르켈 총리를 음란하게 지칭했다는 이유로 그리스 당국으로부터 2만5000유로(3800만원)의 벌금형을 부과받았다. 트랑가스는 지난 22일 현지 TV방송에 출연, "내 나이 63세이다. 나는 전형적인 발칸반도 남국 사람이란 소리를 듣고 있다. 게으르고 부정하다는 소리를 듣고 있는 발칸반도 남국인 말이다. 정말로, 나는 지난 50년 동안 밤낮으로 일해 왔다. 근데 왜 내가 게으르고 사기꾼 같다는 말을 들어야 하나" 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독일에 대한 반감은 나치 독일의 점령에 대한 기억과도 무관하지 않다. 옥스포드대의 애시 교수는 "독일이 (2차 대전 이후 유럽의 주도권을 차지할) 두번째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에 대한 테스트가 현재 진행중"이라며 "유럽연합(EU)이 일정한 역할을 맡길 원하는 사람이라면 독일의 리더들이 테스트를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비전과 스킬을 갖고 있길 바랄 것이다"고 말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을 역임한 로마노 프로티 전 이탈리아 총리는 지난해 말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독일이) 정치적 의지가 있다면 유로화가 기축통화가 될 가능성이 있다. 현재 독일은 진실로 막강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프로티 전 총리의 발언은 제조업 기반의 성장을 바탕으로 지역의 패권을 잡아가는 독일과 중국, 양국의 모습이 유사하다는 뜻이 담겼다. 또 인위적인 위안화 평가절하로 큰 이득을 보고 있다며 미국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중국처럼 독일도 유로화로 인해 성장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는 의미도 담겨있다.
◇ 유로화가 독일 성장 배경?
최근 독일의 경제는 유럽에서 군계일학이다. 통일 후유증으로 1990년대에는 경상수지 적자국이었지만 2000년대 들어 흑자국으로 탈바꿈한 뒤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경상수지가 5~7%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이웃들과 크게 대조된다. 영국과 이탈리아는 2000년대 들어, 프랑스는 2000년대 중반 이후 적자를 나타내고 있다. 수출 호황을 바탕으로 독일의 성장률은 2010년, 2011년 각각 3.7%, 3.0%를 기록했다.
유로존 내에선 독일의 호황은 지역의 무역 불균형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비난이 나오고 있다. 이는 중국이 미국의 경제 회복세에 발목을 잡고 있다는 워싱턴의 주장과 유사하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프랑스 재무장관으로 일할 때 독일은 유럽 전체의 이익을 위해 경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마리오 몬티 아탈리아 총리 역시 지난 1월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독일이 유로화 도입으로 혜택을 받고 있지만, 독일은 이를 충분하게 인정하지 않았다는 요지로 독일을 비난하기도 했다.
사실 독일이 유로화 최대 수혜국이란 점은 분명하다. 독일 경제는 유로존 내에서 남유럽 국가에 비해 20~30% 평가절하돼 있다고 텔레그라프는 지난달 지적했다. 하지만 환율만으로 독일의 호황을 설명할 수는 없다. 독일의 경제력은 유로존 2위 경제대국 프랑스마저 따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산업 특성과 자체 개혁이 밑바탕이 된 상황에서 환율효과가 더해졌다고 보는 것이 보다 설득력있다.
독일의 산업 특성과 성장 비결은 두 가지 키워드로 설명된다.
바로 산업계의 '선견지명'과 기업인들의 '장인정신'이다.
독일은 GDP에서 수출이 40%를 상회할 정도로 교역의존도가 매우 높다. 이런 가운데 독일은 신흥시장, 특히 지난 30년간 연평균 10%의 고성장을 기록한 중국에 일찌감치 진출해 큰 수혜를 입었다. 독일이 유럽 국가중 중국의 최대 교역국이고, 서방국가 전체적으로도 미국 다음으로 중국과의 교역규모가 많다. 지난해 BMW의 중국 내 판매량이 38%나 증가할 정도로, 중국 부자들은 독일산 럭셔리 자동차에 돈을 물쓰듯 쓰고 있고, 중국 산업 현장에서는 독일산 기계에 대한 선호도가 매우 높다.
특히 신흥국에서 독일 제품은 자동차에서 청소기에 이르기까지 고급 브랜드로 인식이 단단히 박혀있어, 단지 '독일산(Made in Germany)'이란 이유로 비싸게 팔린다. 신흥시장이 급성장하면서 독일은 그 만큼 수혜를 많이 보았다. 그러나 신흥시장에서의 독일의 선전은 요행수가 아니다. 신흥국, 특히 중국의 도약을 일찌감치 눈치챈 '선견지명'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독일 정부는 중국 시장의 무한한 잠재력을 오래전에 파악하고 1970년대 중반부터 중국 진출을 선언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1975년 "독일은 중국이 차세대 시장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며 "(과거)서독의 방식은 이 나라 산업이 오랫동안 보여온 전형적인, 장기적 접근법을 보여준다"고 보도했다. 1970년대 중반, 미국 경제는 오일쇼크로 경기후퇴(리세션)에 빠져있었고, 영국 산업계는 위기를 맞고 있었기 때문에 시장 개척에는 관심을 둘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영국은 특히 실직과 파업이 심화돼 1970년대 후반에는 150만명이 총파업에 참여한 '불만의 겨울' 시기를 보내야 했다.
◇ 강한 독일을 가능케한 강력한 제조업
독일의 선견지명은 독일 제조업의 특성에서 비롯됐다. 유럽경영기술학교(ESMT) 올라프 프로트너 박사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중국 진출이란 기업의 핵심 결정 사항은 경영진들이 내린 것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장기적 관점과 경쟁력 강화를 중시하는 독일 기업의 장인정신이 작동했다고 설명했다. 독일은 제조업이 주력이기 때문에 멀리 내다본다는 설명이다. 시설투자와 연구개발(R&D) 비용으로 생산비용이 높기 때문에 장기적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는 "독일 제조업체들은 수익이 작기 때문에 오랫동안 존속한다는 점은 흥미로운 점이다"며 "이 같은 점은 오너의 특징과도 연관이 있다"고 지적했다. 독일 기업들은 개인 혹은 재단 소유가 많기 때문에 단기 차익 실현이라는 주주들의 관심은 중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글로벌 엔지니어링 기업 보쉬는 로버트 보쉬 재단이 지분의 약 90%를 갖고 있다. 이외에 370만개에 달하는 중소기업이 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점도 독일 경제의 경쟁력으로 꼽힌다.
아울러 내부 개혁 효과도 작용했다. 고실업율과 저성장으로 고전했던 독일은 2003~2005년 실업자들의 노동시장 재유입을 유도하고, 노동시장 유연성을 높이고 대신에 노동비용을 줄인 '하르츠'(Hartz) 개혁을 통해 노동 정책에 큰 변화를 줬다. 민간영역에선 노조와 사측이 자율적 합의를 맺어 공장의 해외이전을 막는 대신에 임금을 줄였다. 이후 2005년 12%에 달했던 독일의 실업률은 지금은 절반 수준인 6%대로 뚝 떨어졌고, 이는 경제 부흥의 발판이 됐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피폐화된 국가 경제를 추스르기 위해 정치적으로 몸을 바짝 숙여야 했던 독일은 유로존 재정위기 이후 자국의 경제 모델을 유럽 각국에 전파시키며 경제적 초강대국의 역할에 점차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독일의 리더십이 단기간에 부상한 만큼 그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다.
가혹한 긴축을 요구받고 있는 그리스 등 남유럽 국민들은 과거 나치 독일의 기억을 끄집어내며 독일에 비난을 쏟아내고 있고, 국제사회는 독일이 리더로서 역할에 맞는 책임의식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며 질타하고 있다. 유럽 내 경제 1위, 인구 1위국 독일은 '해도 욕먹고, 안해도 욕먹는' 딜레마에 처해있다.
◇그리스 등 남유럽에서 거센 반독일 정서 =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달 "남유럽 전역에서 '추한 독일인' 이미지가 되살아나고 있다"며 "다른 국가들을 가난하게 만들고 정부를 무너뜨렸으며 온갖일에 개입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는 독일을 주도로 한 EU의 요구에 따라 기존 정부가 물러나고 기술관료 정부가 들어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대해 메르켈 총리의 측근인 토마스 데 마이치에레 독일 국방장관은 지난달 열린 뮌헨 연례안보회의에서 독일이 처한 딜레마를 설명했다. 그는 "권리에는 그에 상응하는 의무가 따른다"면서도 "유럽에선 많은 사람들이 독일의 리더십이 커지는 것에 대해 우려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유럽 내 나치 독일에 대한 기억으로 독일은 여전히 자유스럽지 않다는 설명이다.
경제적으로는 심화된 무역불균형에 따른 남유럽 국가들의 불만도 독일이 직면한 문제이다. 남유럽뿐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재정위기와 무역적자로 인해 어려움이 커지면서 독일에 대한 불만이 나오고 있다. 유로화 사용에 따라 수혜를 입었지만 위기 해결에선 희생보다는 긴축과 예산절감만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독일 일간 디차이트의 편집장 조세프 제페는 최근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독일이 경제대국이면서 정치적으로 소국이었던 시절은 지났다고 지적한 뒤 "(하지만) 독일은 리더의 역할을 하기 위한 장치를 아직 마련하지 못했고 리더로서 편안함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현 상황을 설명했다.
_ 기획기사 '독일의 독주와 한계' /머니투데이